"복용 시 꼭 주의사항을 따르세요."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순간에는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았던 것들도 결국에는 잊혔다.
하지만 그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던 나의 모습은 영락없는 환자의 꼴이었다.
의사는 나에게 가장 강력한 치료제를 처방해 주었다.
진료실을 나왔다.
이상하게도 원무과는 진료비를 받지 않았다.
처방전을 내밀자마자 약사는 곧바로 약장에서 약통을 꺼내 종이봉투에 담아주었다.
이상하게도 약사 역시 돈을 받지 않았다.
의사와 약사 모두 시간은 아주 아프지만 확실한 치료제라고 했다.
그리고 약통 안에 구겨져있는 복약지도 안내문을 꼭 읽어보라고 주문했다.
복용은 생각날 때 하면 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집에 돌아와 곧바로 약통에서 꺼낸 안내문에 적힌 주의사항들을 정리해 보았다.
복용 시 해서는 안 되는 것들..
나는 바빠져야만 했고 스스로에게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잠시의 여유도 주어서는 안 되었다.
문득 생각나 일상의 나를 괴롭히는 수준, 그 이상이면 안되었다.
처음 그녀에게 빠져든 그날, 그곳,
그녀에게 내 진심을 꺼내어 보였던 그날, 그곳,
그녀의 손을 처음 잡았던 그날, 그곳을 떠올려서는 안 되었다.
그녀와 이별하고도 괜찮을 줄 알았다고 생각했던 그 과거를 후회해서는 안 되었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에 잠식되어서는 안 되었다.
지독한 감기로 몹시도 아팠던 날, 그녀가 황급히 사다준 소고기야채죽의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를 재활용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의 증명사진을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가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를 내 품에 안았을 때 느낌의 기억이 눈을 감을 때마다 상기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와 이별하지 않았을 어느 평행우주 속의 나를 무의식 중에 상상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의 차가운 말투마저 반가워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를 그리워하고 후회하며 잠을 설쳐서는 안 되었다.
사랑을 부메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해서는 안될 것들이 그리 많았는데도
나는 의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