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어느 날
태양 볕에 말라비틀어진 이끼가 흡사 닭똥을 뿌려 놓은 듯 섬 전체를 감싸 안았다. 섬에는 수 만 마리의 새들이 가로 세로 80cm정도 남짓한 공간을 불가침 영역으로 하여 저마다 한 가구를 구성하며 오밀조밀 살아가고 있다. 한 집에는 아비 새, 어미 새, 아기 새가 살고 있다.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관계로 실수로라도 경계선을 밟을 라 치면 여지없이 살벌한 응징을 주고받아야만 한다. 아비는 갓 태어난 새끼를 위해 쉴 새 없이 먹이를 구해 날랐고 어미는 외부 침입자로부터 새끼를 보호해가며 살림을 꾸리기 바빴다. 오늘도 어김없이 사냥을 나갔던 아비가 돌아와 삼켰던 토사물을 개어내자 새끼는 그것을 힘겹게 받아먹는다. 한쪽 귀퉁이엔 아직 부화되지 않은 알 속 존재들이 자신을 알리고자 세상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평온했던 일상도 잠시,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차 거들먹거리더니 스산한 밤바람과 함께 강력한 힘을 예고했다. 대지를 여러 조각으로 나눌 기세로 지진은 섬 전체를 쪼개듯 흔들었고 하늘에는 섬광이 뻔쩍 이더니 바다에는 해일이 일었다. 19호 태풍 림프(limf)가 요란한 서막을 알려왔다. 그 사이 부화를 꿈꾸던 생명은 외부에서 느껴지는 음산한 기운에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여태껏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산통의 전조 증상이었다.
점차 거세진 태풍은 한파와 화마(火魔)까지 동반했고 어느 덧 대문 앞까지 찾아온 광풍이 견고했던 둥지를 손가락으로 툭 튀기듯 튕겨버리자 우지끈 파열음과 함께 그간 존재를 감싸왔던 껍데기에 심각한 손상을 가해졌다. 세상이 강제로 열려 버린 순간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어미가 알을 추슬러 보니 다행히도 액체 상태로 흐르지 않았고 축축했지만 고체의 형상으로 생존을 알려왔다. 죽을힘을 다해 적으로부터 존재를 지켜야할 이유가 생겼다.
태풍이 물러가고 따스한 햇볕이 내리 쬐는 어느 날, 한 편에서는 죽은 사체들이 바람에 날려 버려진 빨래처럼 흩어져 있었고 포식자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만찬을 즐겼다. 남은 찌꺼기는 파리 때와 이름 모를 벌레들의 몫이었다. 림프로 인해 섬의 개체 수가 반으로 줄었다. 사냥을 나갔던 아비 또한 돌아오지 못했다. 갓 태어난 존재는 아비의 죽음을 직감이라도 한 듯 오열했다. 어쩌면 그 눈물은 힘겹고 배고플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앞으로 아비를 대신해 어미가 먹이를 구해 와야 한다. 눈도 뜨지 못한 생명을 두고 사냥을 나가야하는 어미의 마음이 편치 않다. 강제로 깨어난 존재가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먹이를 물고 올 어미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약한 생명은 선선한 날씨에도 고열의 열병에 시달려야 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자신을 혐오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수리 때의 습격을 받았던지 어미마저 돌아오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사흘을 굶던 존재는 불길한 상황을 직감하고는 깨진 알 조각을 이불 삼아 머리를 구겨 넣어 화석처럼 굳어 지냈다. 흡사 겨울을 나기 위해 월동 준비라도 할 냥 최선을 다해 굶주림을 연습 하며 어미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오래되면 증오로 바뀐다고 하였던가, 돌아오지 않는 어미가 원망스럽다. 앞으로 펼쳐질 생존 게임에서 보호자 없는 최약체에게는 최악의 패널 티가 주어진다. 포식자들은 이러한 존재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데려가 자신들의 새끼들을 위한 장난감으로 이용 한다고 한다.
이제 겨우 실눈을 뜬 존재는 추위와 배고픔에 허덕이다 세상 밖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가 실수로 옆집을 침범하고 말았다. 옆 집 성체는 기다렸다는 듯이 침입자를 쪼아버렸고 가격 당한 존재는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떨어진 곳에 성체 또한 침입자를 쪼아버렸다. 심각한 타격을 받은 존재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찢어진 이마는 벌어져 두개골이 보였고 붉은색 선혈이 흘렀다. 앞으로 한 차례 더 공격이 가해진다면 살아날 확률은 없어 보인다. 다음 번 굴러 떨어지는 곳이 마지막 종착지일 것이다. 하염없이 낙하하는 존재는 다음 세상을 기약하며 체념한 듯 속삭인다. ‘굶어 죽는 거나 굴러 떨어져 죽는 거나 죽는 것은 매한 가지 아닌가, 운이 조금 나빠 죽음이 빨리 찾아 온 것뿐인걸...’ 존재는 죽음을 초월한 자신이 새삼 놀랍고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전 어미가 뱉어 둔 토사물이 맛없다며 투정부리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미소 지었다. 그리곤 당시 그것을 다 먹어치우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삶의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범죄를 저지르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수처럼 존재는 어느덧 죽음의 뾰쪽한 염라대왕 앞에 다다랐다. 극도의 긴장감이 공포로 바뀌는 순간 살려만 준다면 밥투정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존재는 본능적으로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숨을 참았으나 매서운 눈을 가진 맹금과 마주하자 “헐”하며 졸도하고 말았다. 이곳은 예전 어미가 울기만 하는 자신을 두고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한 의도로 겁주던 부엉이의 둥지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서일까 갑자기 포근했던 어미 품이 느껴졌다. 꿈인가? 한참을 졸다 눈을 떠보니 평생에 모을 수 있는 운을 죄다 끌어다 사용했던 것일까? 성체는 존재를 품고 있었다. 아마도 자기 새끼로 착각 했는지 아니면 동정심에서 품었는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해 보인다. 강력한 힘을 가진 부엉이로부터 한껏 따듯하고 강화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어느 덧 시간이 흘러 존재는 무럭무럭 자라 청년이 되었다. 청년이 되자 날개 뼈 안쪽이 단단해졌고 제법 날고자 하는 날개 짓도 거칠어졌다. 이제는 간혹 실수로 다른 집에 굴러 떨어져 다른 성체에게 공격을 당하더라도 일방적으로 맞지 않았다. 비록 힘은 열세였지만 악으로 싸웠고 상대가 쪼면 움츠렸다가 순간적으로 반격을 퍼부어 상대를 당황시키곤 하였다. 가끔 자신보다 큰 개체에게 일부러 싸움을 걸어 자신의 힘을 가늠해 보는 여유도 가졌다. 죽음을 초월한 존재는 “불사조”가 된 것일까 위기에 직면하면 할수록 더욱 강렬해지는 피를 느꼈다. 이제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죽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알을 깨기 위해서 존재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 내야했고 스스로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만 진정한 성체가 될 수 있을을 느꼈다. 만에 하나 그러한 과정 없이 누군가 알을 깨 버리면 후라이가 된 다는 것 또한 어렴풋이 배웠다. 또한 만약 어미 품고 있는 알 속에 안주하여 알을 깨지 않는다면 요상한 생명체로 갇혀 살다 늙어 뭉개질 것이다. 존재는 과거를 떠올렸다. 한때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 아브라삭스가 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태풍 림프로 부터 강제로 깨져 버려진 후에는 그런 달달한 숙명의 시간은 사치와도 같았다. 지금은 아브라삭스는 고사하고 누군가의 만찬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살아가는 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할당되어있다. 존재는 그것을 반드시 찾아 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