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감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묻는다.
"디자이너면 그림 잘 그리시겠어요?"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디자이너다. 그런데도, 18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심스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디자이너다"라고.
처음 디자인을 접한 건 아주 작은 도서관에서였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건 우리 마을 도서관이었다."
빌 게이츠의 말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그 한 줄은 마치 내게 쓰인 문장 같았다. 컴퓨터에 흠뻑 빠져 있던 나는, 그 길을 도서관에서 다시 걸어보기로 했다. 실무 중심의 책들을 읽으며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그 과정을 통해 '코딩만으로' 홈페이지를 구현하는 재미에 빠졌다.
그 시절, 디자인은 몰랐다. 친구의 멋진 와레즈 사이트를 흉내 내며 테이블 구조에 색깔만 입혀 대문을 만들었다. 겉보기엔 비슷했지만,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당시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 '허전함'이 바로 디자인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허전함의 정체를 찾아 나섰다. 가장 먼저 만난 건 '타이포그래피'였다. 글자의 형태가 주는 인상, 정렬 하나에 따라 바뀌는 무게감. 이미지 한 장에 단단한 타이포 하나만 있어도 그럴듯해 보였던 시절, 나는 비로소 디자인의 감각이라는 것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었고,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드림위버를 다루며 백지에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기술을 익혔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엔 질문이 남아 있었다. "나는 왜 저 사람처럼 못 만들까?" 기술은 늘어갔지만, 그 감각의 벽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창업을 거쳐 취업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첫 회사 생활은, 티켓몬스터라는 소셜커머스 기업에서 콘텐츠 디자이너로 일하면서였다. 하루에 1~3건씩 새로운 딜 페이지를 만들고, 그 상품의 세일즈 포인트를 포착해 페이지를 구성했다. 상품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과정은 나에게 놀라울 만큼 잘 맞았다.
썸네일 하나에 따라 클릭률이 달라지고, 이미지에 담긴 정보의 깊이에 따라 CS가 줄어드는 경험을 하며, 나는 디자인이 단지 '예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했다. 정보가 디자인을 이끌었고, 디자인은 판매를 움직였다. 텍스트는 장식이 아니라 설명이었고, 시각은 감정이 아니라 기능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리 멋지게 만들어도 제품이 형편없다면 팔리지 않았다. 반대로, 좋은 제품은 투박한 디자인에도 소비자의 손에 들렸다. 디자인은 마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때때로 마법 같은 역할을 했다.
그 후 몇몇 회사에서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일했다. 기업의 이미지와 제품의 정체성을 함께 설계했다. 지나고 나니, 그 작업은 결국 '브랜딩'이었다. 그러나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기업이 그것을 담아내지 못하면 오히려 이미지의 격차는 소비자에게 실망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브랜드의 그릇을 먼저 본다. 과하게 빛나는 디자인이 아닌, 그릇에 맞는 디자인을 하기 위해.
나는 속도가 빠른 디자이너였다. 작업의 양을 소화하기 위해 많은 레퍼런스를 찾아보았다. 좋은 디자인을 흉내 내고, 눈에 익히고, 다시 변형하며 내 것으로 만들었다. 감각은 그렇게 쌓여갔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디자인은 감각이다. 그 감각은, 많이 보고 자주 생각할수록 자라난다."
처음엔 주어진 주제에 세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던 사람이, 지금은 수십 가지 아이디어를 그릴 수 있다. 그건 재능이 아니라 훈련이다.
해외 인터뷰에서 유명 디자이너들이 영감에 대해 말하는 걸 들으며, 나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디자인은 정답이 없다. 오랜 시간 공들인 작업도 누군가에겐 아무 감흥이 없을 수 있다. 대중을 위한 디자인이 있는가 하면, 추상화 같은 실험도 존재한다. 모두 디자인이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오해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디자인은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기능을 품는다. UI에서는 접근성과 통일성, 커머스에서는 썸네일과 세일즈 포인트, 브랜드에서는 정체성과 조화. 그 모든 맥락을 함께 읽을 수 있어야 진짜 디자이너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기획도 하고, 데이터를 보며 판단도 한다. 프로그래머가 기획을 하고, 마케터가 브랜드를 고민하는 시대다. 디자이너 또한 좁은 영역 안에 머물 수 없다.
지금 돌아보면, 디자인은 '그림을 잘 그리는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디자인은, 세상을 더 깊이 보고 더 넓게 이해하는 또 하나의 언어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18년 동안 디자인을 하며 내가 얻은 본질 중 하나다.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 문장에 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