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 -
“재수 없어!”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말이 가리키는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아이의 입에서 툭 하고 나온 말. 가시 돋친 날카로운 말을 던진 줄도 모르고 나를 보며 웃기까지 한다.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이미 속은 거슬렸다. 불쾌했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저는 이해가 안 돼요.”
‘그건 네가 아니라 적어도 내가 할 소리 아니니?’
입으로 새 나가지 못한 그 말을 다시 주워 삼켰다. 작심한 듯 누나의 허물을 열심히 고자질하는 중이라 우선 들어주기로 했다. 사사건건 트집 잡고 못살게 굴어 밉다는 누나. 다툼 끝에 나온 말이 ‘선생님, 재수 없어!’란다. 그렇게 말하는 누나가 이해 불가라서 속상하단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나눈 후 우리는 그만 상담을 마쳤다. 더 이상 그들 사이에 끼고 싶지도 더더욱 남매 싸움에 소환되어 ‘재수 없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 남매를 가르쳤다. 담임으로서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인연’이 깊다고 표현하곤 한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감사의 말을 전하며 졸업식에서 같이 사진을 찍은 기억도 생생하다. 반갑다는 부모에게 졸업한 제자의 안부를 물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그런데 왜 그 아이는 나를 향해 날을 세웠을까?
그날은 수련회 마지막 날이었다. 점심 무렵의 햇볕은 뜨거웠다. 거의 뜬눈으로 뒤척인 데다 지치고 피곤해서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6학년 수련회를 마치고 반별로 해산하려는 우리에게 교장은 운동장에 줄을 서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훈화. 마이크를 통해 쩌렁쩌렁 들리는 소리는 ‘다들 수고했으니 주말 동안 잘 쉬거라.’ 대충 그런 말이다. 그 말이 아니라도 집에 가자마자 학생들이 지쳐 쓰러질 것이 뻔하다. 이렇게 땡볕에 서서 훈화를 듣기보다는 1초라도 빨리 하교시켰으면 싶었다. 속으로 그랬을망정 내색하지 못하고 참고 기다렸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끝날 것 같았다.
“선생님, 진짜 언제 끝나요?”
우리 반이 서 있는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짜증을 담은 목소리다. 귀라도 둔하고 무디면 좋았을 텐데. 아이의 감정이 거울처럼 그대로 반사되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봤다. 가만히 기다리던 다른 아이들이 그런 나를 보고는 흠칫 놀라는 기색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팔과 다리를 흔들며 온갖 성질을 부렸다. 다행히 학년 부장의 귀에까지는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귀찮아질 상황이 생기는 게 싫어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넌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우리, 좀만 참아보자.’라는 말 대신에 참았던 내 화까지 보태어 쏜살같이 나갔다. 순간 아이의 얼굴빛이 변했다. 그런 말이 담임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순간적으로 너무했나 싶었지만 얄미운 마음이 컸기에 나도 그 자리를 벗어났다.
책 『언어의 온도』에는 ‘머리에만 남겨지는 게 아니다. 가슴에도 새겨진다.’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수련회 마지막 날에 쏘아붙인 말이 그 아이에게 상처로 새겨졌을지도 모른다. 운동장에서 우리를 세운 행동에 큰 실망을 느낀 나는, 펄펄 끓는 운동장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분노를 아이에게 쏟아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라는 말도 있지만, ‘힘들지? 조금만 참아.’라는 말도 있다. 굳이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어른답게 행동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린 것 같다. 이제야 비로소 ‘재수 없어!’라는 말이 나를 향한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언어에 온도를 담은 책 제목을 보고 꼭 읽어보고 싶었다. 나의 부족함이 양심에 걸려 그 책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갔다. 『언어의 온도』를 처음 만났을 때, ‘내 언어 온도는 몇 도일까?’를 상상했다. 불편할 정도로 너무 뜨거우면 참 곤란하겠고 그렇다고 곁을 주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냉기가 돌면 그것도 고민이다. 그렇다면 따뜻한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인품과 언어 사용법을 배우고 연습하면, 나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언어의 온도』를 쓴 저자는 그런 방법이나 그런 사람들을 소개하지 않는다. 그리고 온도를 측정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저자는 사람을 보는 눈이 맑고 투명하다. 따뜻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들여다본다. 그래서 몽니를 부리거나 열망이 탐욕으로 변해도 그의 사연을 짐작하고 이해하려고 귀 기울인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이웃들의 행동과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나가는 능력이 놀라울 정도다. 그중 전철 안에서 마주 앉아 들었다는 이야기가 마음을 울렸다. 아픈 손자와 할머니가 주고받는 이야기는 사소한 대화에서 시작한다.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나는 아픈 손자의 질문에 당연히 “네 할미니까 잘 알지!”라고 대답했을 거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사랑은 그 이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아마 본인이 아파 봤기 때문에 손자를 아프지 않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니겠냐고 둘의 마음을 헤아린다.
언어는 각자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온기 있는 언어는 슬픔을 감싸 안아주며 지친 이들의 이야기와 고민을 주고받으며 위안을 받는단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언어에는 감정이 잔뜩 실려있기 마련이라 말하는 사람은 시원할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정서적 화상을 입을 수 있다고 한다. 나를 두고 한 말 같아 어찌나 뜨끔했는지 모른다.
감정이 실린 말은 위험하다. 특히 불편하고 짜증이 나는 감정이라면 더욱 그렇다. 상대방이 어리다면 조심해야 하는데, 나는 오히려 함부로 뱉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 채찍질하며 되돌아보았다. 교사라는 이유로, 나이가 많은 어른이라는 이유로, 혹은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던지지는 않았는지…. 어쩌면 그런 말들을 셀 수 없이 많이 한 것 같다.
꽁꽁 얼어붙은 손을 주머니에 넣으면 핫팩 덕분에 금세 따뜻해진다. 가슴에 핫팩을 품고 말하면 예전보다 나아질까? 그때보다 내 언어의 온도가 조금 더 따뜻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