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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Jun 18. 2023

17.  호구짓?


 가족들이 앉아야 할 비행기 좌석이 아쉽게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아서 좀 의아했지만 지쳐있는 몸은 이미 좌석 번호를 찾느라 바빴다. 남편은 멀찍이서 손을 흔들었다. 손짓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난 특별히 불편하지 않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편이다. 남편 또한 따로 있는 것이 아무런 문제 될 것 없다고 했다. 나와 아이들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도착할 일만 남았으니 피곤한 몸을 얼른 의자에 누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는 순간,

 "저랑 자리 좀 바꿔주실래요?"


 그는 일주일 동안 같이 여행했던 일행 중 한 사람이었다. 불쾌감이 잔뜩 묻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던진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가족도 우리처럼 서로 떨어져 있다는 을 알게 되었다. 그의 처지가 눈에 들어왔고 이해도 되었다. 그 남자의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에 고민이 되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나는 선뜻 그러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는 더 당당하게 나왔다. 

  "그쪽 자리랑 바꿨으면 좋겠는데요. 안 될까요?"

  그의 말에서는 미안한 마음이나 어려운 말을 꺼내고 있다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내 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지금 누굴 위해 망설이는 거니? 매번 이러는 너의 모습이 답답해. 그러면서 안 될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처럼 나도 아이들 곁에 있고 싶어. 그를 도와준다는 것은 내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것이야.'


 흔히 다른 사람의 요구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는 이들을 호구라고 칭한다. 어리숙하고 자기주장이 없으니 이용하기 아주 쉬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말이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는 느낌일 때가 종종 있다. 비행기 안에서의 경우가 그렇. 그는 자신이 요구하면 거절하지 않고 들어줄 만한 사람으로 나를 봤던 것이다.


 이런 호구짓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언젠가는 학교관리자가 부탁할 일이 있다며 내가 있는 교실로 찾아왔다. 관리자는 정중했지만 좋은 소식을 들고 오지는 않았다. 갑자기 출산휴가로 쉬게 된 교사가 맡은 업무를 내가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어려운 일은 별로 없을 거라며 재차 부탁을 한다. 좀 부담은 되었지만 그의 말대로 어려워 보이지 않아서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다. 그 후 내 업무에 얹힌 두 개의 다른 업무까지 처리하며 일 년을 보냈다. 어땠느냐고? 다시는 그런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거절하지 못하는 이 버릇은 여전하다. 남들이 하지 않겠다고 무진 애를 쓴 업무를 어느덧 내가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씁쓸했다. 또 호구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업무능력이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기 원하거나 남들의 칭찬에 약하다. '싫습니다'라는 말을 안 하는 이유도 상대방에게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봉을 잡히면서 이용당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니오. 그건 싫습니다.'라는 말을 못 해서 불편을 겪는 변변치 못한 사람이다.


 무례한 이런 요구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그 당시의 내 대답은 우물쭈물하고 어정쩡했다. 상대방에게 내 생각을 솔직하게 전하지 못했다. 만약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어땠을까? 


by 오솔길


 노인경 님의 그림책 『곰씨의 의자』에 나오는 곰씨를 보자 자꾸 마음에 걸렸다. 말 그대로의 곰 같은 주인공은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처럼 너무나 비슷했다.


 그의 일상은 의자와 함께 한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의자'는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의 이름을 뜻하는 것을 넘어 곰씨의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 영역을 통틀어 말한다. 그는 여기에 앉아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고 있다.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로 여유로운 삶이다. 피곤한 여행자인 토끼에게 자신의 의자를 권하며 쉬게 할 정도로 따뜻하다. 아니 쓸데없는 오지랖을 떨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배려가 결국 갈등의 원인이 된다.  


 토끼와 친구가 되면서 금세 수많은 식구들이 들어찬다. 모든 이들이 사용하기에 비좁은 의자가 되자 곰씨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만 나가달라는 말을 못 한다. 객식구였던 토끼들은 나갈 생각이 없으니 어쩌면 좋은가. 곰씨는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저는 그동안 힘들었어요. 함께한 시간은 소중하지만 앞으로는 혼자 있고 싶어요. "

곰씨는 자신의 생각을 차근차근 조용히 말하며 토끼들을 이해시킨다. 역시 솔직하게 말하는 용기가 가장 중요하.



 소소한 책그림 후기 ;  곰씨와 나는 닮았다. 그래서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미는 곰씨 같은 이가 좋다.


오늘의 책
『곰씨의 의자』, 노인경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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