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인경의 『곰씨의 의자』 -
가족들이 앉아야 할 비행기 좌석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단체여행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좀 의아하긴 해도 지쳐있는 몸은 이미 좌석 번호를 찾느라 바빴다. 남편은 멀찍이서 손을 흔들었다. 손짓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우리 가족은 여행하는 중이라면 관대한 편이다. 특별히 불편하지 않으면 문제 삼지 않거나 묻거나 따지는 일이 거의 없다. 남편도 따로 있는 것이 그리 문제 될 것 없다고 말했다. 나와 아이들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도착할 일만 남았으니 피곤한 몸을 얼른 의자에 누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는 순간, 멀리서 내가 있는 좌석 쪽으로 오는 사람이 보였다. 건장한 체구의 그 남자가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올수록 불안해졌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좌석 번호를 잘못 알고 앉은 것은 아닐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
“저랑 자리 좀 바꿔주실래요?”
뭔가 머뭇거리듯 멈추었지만 나를 향한 분명한 목소리였다. 그는 일주일 동안 같이 여행했던 일행 중 한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가족도 우리처럼 서로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처지가 눈에 들어왔고 이해가 되었다. 그 사람의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이 고민으로 다가왔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충분했다.
선뜻 그러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의 요구를 들어주자니 우리 가족은 정말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이었다. 남편과 떨어져 있는 사태가 못내 아쉬웠던 나로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생을 데리고 다니던 그와 같이 온 그의 일행이 떠올랐다. 투정을 부리며 말을 듣지 않던 아이와 말리지 않는 부모들. 여행 내내 가이드와 입씨름하던 일행이었지만, 지금은 부모들과 떨어져 있는 아이들이다. 사정이 딱해 보였다. 그래서 좀 망설였던 모양이다. 그 짧은 순간이 길었는지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당당해졌다.
“그쪽 자리랑 바꿨으면 좋겠는데요. 안 될까요?” 그의 말에서는 미안한 마음이나 어려운 말을 꺼내고 있다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내가 호구 같은 사람인가?’
이런 호구 짓은 직장에서도 비슷하다. 언젠가는 학교관리자가 부탁할 일이 있다며 우리 교실로 찾아왔다. 관리자는 정중하게 말하고 있지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갑자기 출산휴가로 쉬게 된 동료의 업무를 내가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려운 일은 별로 없을 거라며 재차 예의 있게 부탁했다. 부담은 돼도 그의 말대로 어려워 보이지 않아서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다. 그 후 내 업무에 얹힌 두 개의 다른 업무까지 처리하며 일 년을 보냈다. 쉬워 보였던 그 일은 내 생각과 다르게 복잡하게 처리할 문제들이 발생했다. 버거웠던 시간을 보내며 호구 같은 자신을 자책했다.
그런데 거절하지 못하는 이 버릇은 여전하다. 남들이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일을 어느덧 나란 사람이 하고 있었다. 못하는 이유를 들어가며 적당히 빠져나가는 후배들을 보면 바보가 별것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봉을 잡히면서 이용까지 당하지는 않지만 ‘아니오. 그건 싫습니다.’와 같은 말을 못해 불편을 겪는 변변치 못한 사람이다.
비행기 안에서의 내 대답은 우물쭈물했고 어정쩡했다. 상대방에게 내 생각을 솔직하게 전하지 못했다. 만약 이 책의 곰씨를 먼저 만났다면 대답이 달라졌을까?
노인경의 그림책 『곰씨의 의자』에 나오는 그를 보자 마음이 불편했다. 답답할 정도로 곰 같은 주인공의 모습이 어쩐지 나랑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똑똑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내 모습 같아 그가 안타까우면서도 속으로는 답답했다. 말 그대로 이름까지 ‘곰씨’다.
그의 일상은 의자와 함께 시작한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의자’는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의 이름을 뜻하는 것을 넘어 곰씨의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 영역을 통틀어 말한다. 그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신다.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로 여유로운 삶이다. 피곤한 여행자인 토끼가 나타나면서 여유는 사라지고 일상이 무너진다. 그의 의자를 권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아니,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더니 결국 보기 좋게 혼이 나게 된다. 같이 사용하게 된 의자는 토끼네 가족들로 들어찬다. 의자는 비좁고 곰씨는 불편해졌다.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만 나가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나를 보듯 갑갑했다. 고구마를 먹고 체한 것처럼 꽉 막힌 느낌이다. 갈수록 한심해서 의자까지 토끼에게 뺏길 것 같아 걱정되었다. 괜히 곰 같다는 말이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던 그때, 곰씨가 결단을 내린다.
“저는 그동안 힘들었어요. 함께한 시간은 소중하지만 앞으로 혼자 있고 싶어요.”
결국 솔직하게 말하는 용기가 가장 중요하다. 곰씨가 그걸 해대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런 용기를 못 내고 속으로 끙끙 앓는 답답한 호구는 오히려 나와 더 닮아있다. 이제라도 곰씨에게 배운 대로 당당하게 말해야지 않을까. “아니오. 그건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