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질문이다. 당연히 그림자는 늘 검은색이거나 어두운 색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림을 그릴 때면 의심 없이 검은색을 그대로 쓰거나 비슷한 색으로 칠했다. 하지만 어반스케치 시간에 나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았다.
가방을 풀자마자 준비물을 펼쳐 놓았다가, 급히 한쪽으로 밀어야 했다. 베테랑 수강생인 것처럼 밑그림까지 공들여 그려왔는데, 강사님은 예상과 다르게 음영 발색표를 만든다고 했다. 건물 사이로 난 골목길의 그늘이나 우거진 나무 아래 그림자처럼 어두운 부분을 표현하는 일이 그림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준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결국, 물감과 물의 양을 조절하며 하나하나 색을 만들었다.
프러시안 블루의 깊이 있는 청색과 번트 시에나의 따뜻한 갈색이 만나자 예상치 못한 오묘한 색이 나타났다. 이어서 다른 색깔들로 발색표를 만들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관심 밖이었던 음영색들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색을 칠하며 새로운 걸 알았다. 늘 스쳐 지나던 반석천의 돌 아래 그림자도, 나무 그늘도 모두 제각각의 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있다고 한다. 나 또한 그림자처럼 감추고 싶은 모습이 있다. 심리학자 융은 그림자를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아의 일부라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사회가 원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그림자 속에 감춘다고 한다. 하지만 그림자는 단순히 부정적인 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창조성과 잠재력이 숨어있는 보물창고일 수도 있다고 한다.
"꼼꼼하게 잘하셨어요. 선생님만의 색이 잘 드러나네요."
"그림자를 표현하는 색이 이렇게 다양한 줄 몰랐어요."
그동안의 고정관념 때문일까, 미성숙한 자존심으로 얼룩져 칙칙한 색, 지나온 시간 속 부끄러운 모습들이 켜켜이 쌓여 숱처럼 짙어진 색, 드러내고 싶지 않은 민낯처럼 깊은 물속을 떠올리게 하는 칠흑빛 푸른색…. 이런 색들이 나와 닮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면이라고 해서 모두 어둡고 칙칙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만든 발색표처럼, 내 그림자도 이미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철이 들면서감추고싶은 것들도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내 그림자는 이미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 속에서 그림자가 깊이를 더해주듯 내 안의 그림자도 나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이제는 검은색으로만 채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