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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주 차 쉬었음 청년의 진솔한 속마음

대학병원 간호사, 정신건강복지센터를 거쳐 쉬었음 청년으로

https://youtu.be/EkAbQwP2oUo?si=GYb7o4r4PkglRT5w

(제 유튜브 채널에 방문하시면 오디오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대학병원과 정신건강복지센터를 거쳐 쉬었음 청년이 되었다

어느덧 쉬었음 19주 차, 같이 가자고 해도 시간이 자꾸만 저기 앞에서 날 기다립니다. 차가웠던 바람도 이제는 미적지근합니다. 그리고 문득, 왼쪽 엄지손톱 주변이 아프다는 게 느껴집니다. 나는 불안할 때 왼쪽 엄지를 괴롭히곤 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됐습니다. 평생 써먹을 줄 알았던 간호사 면허는 대학병원 4개월, 정신건강복지센터 13개월, 겨우 17개월 만에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나다운 일을 찾겠다며 자신감 있게 퇴사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실패하는 1년을 보내자 다짐했지만, 실패하고 있는 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주위 어른들의 걱정은 시간이 갈수록 커집니다. 그리고 그 걱정은 저를 조급하게 합니다. 며칠 전 제사가 있어 친척 어른들을 뵀습니다. 요샌 뭐 하냐 물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몸의 긴장을 풀고 ‘두려울 게 뭐 있냐, 걱정되고 궁금하시겠지,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대답하자.’라고 대뇌였죠. 그런데,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제 근황을 묻지 않았습니다. 명절에도 용돈을 주신 적 없던 작은할머니는 제삿날 제게 용돈 5만 원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걱정과 배려가 감사하기도, 이런 상황이 야속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이 된 것 같습니다. 주변에선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데, 혼자 ‘내가 공부를 왜 해야 하지?’ 하며 뒤처지는 학생 말이죠. 전에는 그런 친구들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저는 항상 앞서있는, 자신감 넘치는 학생이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저는 앞서있던 게 아니고 운 좋게 학교의 규칙에 잘 맞는, 자신감이 아닌 교만함이 넘치던 학생이었다는 걸요. 학교를 졸업하니 세상은 새로운 규칙을 줍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빨리빨리 돈을 벌라고 합니다. 하지만 평생직업이라 생각했던 간호사가 너무도 맞지 않습니다. 조금 쉬면서 나다운 일을 찾아보려 했더니, 세상은 욕심부리지 말고, 규칙을 따르라 합니다. 그래도 싫다고 뻗대니 벌로 낙인을 찍습니다. 그렇게 주변에 걱정만 끼치는 ‘쉬었음 청년’이 되었습니다.


당신에게 걱정을 끼치는 사람이고 싶지 않습니다. 걱정 끼치는 존재가 되면, 나는 쓸모없어지고, 당신은 나를 떠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버티질 못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병원에서 저는 걱정만 끼치는,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당신에게 나의 힘듦과 두려움을 숨깁니다. 쓸모없는 존재가 돼서, 버려질까 두렵습니다. 마음을 숨기니 당신과 깊이 관계 맺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점점 시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당신에게 걱정 끼치는 나는 싫지만, 내게 걱정 끼치는 당신은 좋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당신이 좋습니다. 당신의 솔직함이 용감하게, 연약함이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당신의 용기 덕에 우리 관계가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 쉬었음 청년의 속마음을 드러내 봅니다. 이를 듣고 당신은, 당신이 방황하며 힘들어하던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마다 꽃피는 시기가 다르다 합니다. 불안하고 조급한 내게 당신이 있으니 걱정 말라합니다. ‘그래도 돈 벌 궁리는 해야 한다.’라는 말은 덤이고요. 당신의 연약함을 통해 내 연약함이 위로받습니다. 당신의 존재가 내게 여유와 힘을 줍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연약함을 드러내는 건 나약한 게 아니라 용감한 거고,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는 신뢰의 표시라는 걸요. 용기 내 연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집니다.

슬라이딩 도어즈(sliding door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문이 닫히고 있는, 그러니까 슬라이딩 도어즈(sliding doors) 하고 있는 지하철을 타냐 못 타냐, 그 사소한 차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는데요. 부부관계 전문가인 존 가트맨(John Gottman) 박사는 부부 관계 속에 이런 슬라이딩 도어즈 모먼트(sliding doors moment)가 있다고 합니다. 부부 관계가 사소한 찰나의 순간으로 결정된다는 거죠. 자 상상해 보세요. 당신은 퇴근 후 저녁을 먹고 개운하게 씻었습니다.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유튜브를 보려고 하는데, 옆에서 배우자가 한숨을 ‘푹~’ 쉽니다.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 알 듯 말 듯한 찰나의 순간이 지하철 문이 닫힐락 말락 하는 운명의 순간입니다. 한숨을 무시하고 맥주와 유튜브를 볼 것인지, 그 찰나의 순간 지하철에 탑승해서 배우자와 이야기를 나눌 것인지 그건 당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당연하게도 행복한 부부는 이런 순간(sliding doors moment)을 잘 알아차리고 상대방에게 다가갑니다.


얘기를 듣고 보니, 누군가 용기 내 연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이 더더욱 소중해집니다. 심지어 이 순간에 그는 마음의 문이 닫힐락 말락 애매한 것도 아니고, 문을 활짝 열고 당신을 마중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의 연약함을 무시하거나, 섣불리 평가하거나, 공격한다면 관계는 파괴됩니다. 파괴되는 건 둘의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이제 연약함을 드러내는 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해지고, 점점 연약함을 드러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당신에게 겪었듯이, 그는 다른 이의 연약함을 무시하고 평가하고 공격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코로나바이러스처럼 사방에 퍼집니다. 모두 마스크로 입을 막고 자신의 연약함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엄격한 잣대만이 남습니다. 연약함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완벽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열심히 노력해 보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완벽해질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하루 종일 끼고 사는 휴대폰에서는 모두가 완벽해 보입니다. 나만 이렇게 힘든가, 나만 이렇게 부족한 사람인가 싶습니다. 이젠 지쳤습니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습니다.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지금의 대한민국이 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19주 차 쉬었음 청년입니다. 쉬었음 청년으로 살아가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쉬었음 청년은 연약하고 주변에 걱정을 끼치는 존재니까요. 어쩌면 그 덕에 연약함을 드러내고 사는 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한 걸음만 뒤에서 바라보면, 인간 자체가 연약하고 주변에 걱정을 끼치는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인간은 스스로 완벽해질 수 없으니까요. 저는 단지 이전까지 운이 좋아서 완벽한 척, 연약함 따위는 없는 척, 척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음.. 아니, 그건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더럽게 나빴던 거네요. 이제는 제가 사랑하고 신뢰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내 연약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운 좋게 쉬었음 청년이 된 덕분에 더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쉬었음 청년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답답하신가요? 안타까우신가요? 아니면 정신 바짝 차리라고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고 싶나요? 잔소리와 조언의 차이는 상대방의 짐을 같이 지고 있냐 없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명절에 한마디 하려면 용돈부터 주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죠. 저 멀리 뒷짐 지고 있던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야기하면 듣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래라저래라 다 아는 듯 떠벌리는 당신의 생각도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대신 당신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아, 이건 좀 부끄러운데’하는 이야기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당신의 용기와 저를 향한 신뢰에 깊이 감사하며, 그 소중한 순간을 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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