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83호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전반기. 금동으로 제작된 것 중에 가장 크고 아름답단다>
왼쪽 아래턱이 뻐근하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때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다. 여기서 더 심해지면 왼쪽 머리까지 욱씬대곤 한다. 통증이 머리까지 올라오면 일상생활이 일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턱에서 시작하는 경고성 신호에 더욱 예민해진다.
안 그래도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데다, 진행 상황마저 지지부진하며, 다른 대안도 없다 보니, 출근길 발걸음이 무겁다. 지하철을 내리자마자 '집에 가고 싶어'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출구를 벗어나면 '왜 이러고 사나' 싶다가, 사무실 앞에 도착해 카드키를 대는 순간 '사는 게 뭔가' 싶다. 저 세 가지 프로세스를 두 달째 반복하다 보니 스트레스 반응이 시작된 것 같다.
그러다가 며칠 전, 출근길에 우연히 반가사유상 포스터를 보게 됐다. 뭔가에 홀린 듯 그 자리에 서서 사진 속 반가사유상을 바라보았다. 자비로운 눈매와 생기 있는 미소, 온화한 표정의 불상이 마치 나를 보고 웃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사유를 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으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지?라는 의문을 품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반가사유상'을 검색해봤다. 작년 말,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 '사유의 방'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반가사유상 두 점을 전시 중이다.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라고 한다. 이번 전시를 포함해 두 점이 함께 전시된 것은 4차례인데, 이번 전시는 10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BTS 멤버도 다녀가 화제가 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지금, 반가사유상에 관심이 몰릴까.
왼쪽 다리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린 이른바 반가(半跏)한 자세에 오른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마치 사유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이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반가사유상을 보면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떠오르기도 한다. 후자는 사유 중인 자의 고민과 번민을 나타내고 있고, 전자는 그 과정을 끝낸 자의 깨달음이 가장 큰 차이점인 듯하다.
깨달음의 미소. 나를 비롯한 많은 관람객들을 사로잡은 그 표정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번 전시를 기획한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 한 신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질문명은 엄청나게 변해왔다. 배고픔에서도 많이 벗어나게 됐고, 삶도 편해졌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거의 변화가 없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고뇌하고, 힘들어하고, 번뇌하는 존재다. 1500년 전 사람들의 내일 아침 끼니가 없을 수 있다는 고민과, 요즘 사람들이 겪는 업무·대인관계 스트레스는 그 종류만 다르지 거의 같다고 본다."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은 미륵이라고 본다. 중생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깨닫는 그 순간의 희열이 미소로 나타난 것이다. 해탈의 순간, 그 최고의 기쁨을 희열이라 하잖나. 그게 얼굴의 미소로 나타난 게 아닐까.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철학적 사고를 해도 되고, 멍 때려도 된다."
'사유'라는 단어에서 오는 학문적인 뉘앙스 때문에, '사유'는 철학적으로 어떤 결론을 도출하는 '학문인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민병찬 관장의 인터뷰를 (확대)해석하면 내가 매일 아침 반복하는 '사는 게 뭔가'도 사유의 일종으로 볼 수 있겠다. 다만, 나의 사유는 그 힘이 약하고, 깊이가 얕아서, 쉽게 말해서 무식해서 질문에서 맴돌기만 할 뿐이다.
어느 시대의 누구라도, 인생이 무엇인지, 사는 게 무엇인지라는 질문 앞에 혼란을 느낄 것이다. 더욱이 현대 사회는 너무 빠르게 변하는 데다, 최근에는 전염병까지 유행하다 보니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다는 불확실성 앞에 혼란은 가중된다. 사회의 불확실성은 개인의 먹고사는 문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불확실한 시대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그래서 지금,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반가사유상'에 매료되는 게 아닐까.
석가모니가 연화대에 앉아 중생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나는 내 책상에 앉아 내 삶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고민이 깊어진다. 이 고민을 조만간 멈추거나 끝내지 않으면 아래턱의 통증이 뺨을 타고 머리로 올라올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답이 없는 문제라면 생각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답이 없는 질문을 붙잡고 있으면 그 질문이 나를 붙잡고 지구 내핵까지 끌고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이 글을 쓰면서 반가사유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차분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어리석은 중생아. 삶이 언제 네 뜻을 따라주더냐. 뜻을 세우지 말고 하루에 충실하라. 시간에 충실하라. 그 시간이 너의 삶을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