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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스 Jul 23. 2024

01. 안정된 삶

<부자엄마 마스의 직장탈출 프로젝트>


<마스의 직장 탈출 프로젝트 이야기>

(아직 탈출전..은 안비밀^^)



부동산의 '부'자로 모르던 평범한 40대 아줌마도 

부자의 길을 걸을수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자

그간 투자이야기를 남겨보려고 합니다.

(재미를 위해 상황마다 약간의 각색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







삐리리리리~. 


어디선가 알람이 울린다. 핸드폰이다. 누가 깰까..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얼른 꺼버린다. 아직 오전6시다. 다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는다. 평소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지만, 주말은 일찍 일어나면 왠지 모르게 손해라는 느낌이 든다. 그간 부족했던 잠을 주말에 보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제 오랜만에 아이가 일찍 잠이 들어, 남편과 함께 진정한 불금을 즐기기 위해 먹은 후라이드 치킨과 맥주가 아직도 소화가 덜 된것같다. 속이 더부룩하다. 아.. 조금만 먹을껄. 늘 먹고나서 후회한다. 조금 더 자고 싶지만, 핸드폰 소리에 아이가 깨버렸다. 어린이집 갈땐 고래고래 소리쳐도 안깨더니 주말엔 벌떡벌떡 잘도 깬다. 주말인데도 이상하게 피곤하다. 조금만 더 누웠다 일어나자.



인생을 곡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나의 20대의 인생곡선은 저기 저 아래 끝도 안보이는 지하밑바닥까지 내려가 있을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겐 황금같았던 20대가 나에겐 45년 인생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대학때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더이상 집을 구할 돈이 없어 부모님은 방이 딸린 식당을 전전했다.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며 간신히 대학을 졸업했다. 마흔이 넘도록 허투루 돈을 쓸 줄 모르는 이 지질한 습관은, 그토록 찬란하기를 고대했던 20대가 비참한 가난과 내내 함께 했기에 저절로 몸에 박혀버렸다. 악착같이 20대를 버텨내면서 꿈이라는 건.. 까맣게 잊고 살았다. 인맥을 쌓거나 사회경험을 위한 시간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당장 오늘 점심 한끼를 걱정해야하는 가난한 대학생에게 희망찬 내일을 꿈꾸며 살기란 마음처럼 쉬운게 아니었다. 굶주린 배를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로 만족해야하는 대학생에겐 10년뒤 미래의 계획보다는 당장 오늘 가야할 알바를 구하는게 우선이었다.



졸업을 하고 학원강사를 하면서 부모님의 가게일을 도왔다. 강사 수입은 조금씩 모아갔지만 생각처럼 커지진 않았다. 돈을 모아서 뭘 해야겠다는 목표도 없었다. 강사생활은 늘 불안정했기에 그냥 모으는게 맞는것 같았다. 그러다 하고 싶은게 생겼다. 부모님이 항상 말씀하시던 공무원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면 하루하루가 불안한 인생이 핑크빛으로 물들지 않을까... 희망이 생겼다. 그렇게 몇년을 모은 돈으로 공무원 수험생활에 들어갔다. 딱 1년정도 알바를 안해도 공부만 할 수 있는 돈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남들 다가는 노량진 공무원학원은 언감생심. 책과 강의 테잎을 중고로 사서 집 근처 도서관으로 매일 출근했다. 남보다 일찍, 제일 늦게 집에 돌아오는게 목표였다. 아침마다 밥과 김치로 점심과 저녁 도시락을 싸서 밥을 먹을때도 강의 테잎을 들으면서 시간을 아꼈다.



딱히 공무원이 꿈은 아니었지만, 돈도, 스펙도 부족해서 대기업은 커녕 중소기업조차 명함 내밀 생각도 못했다. 공무원은 시험만 합격하면 아무런 스펙을 보지않는 점이 내심 마음에 들기도 했다. 등본만 잘 떼어주고, 칼퇴근이 보장되는 여자가 하기에 딱 알맞은 직업. 내가 아는 공무원의 전부였다. 구렁텅이에 빠진 내 인생을 구하려면 공무원이 답인것 같았다. 공부는 잘 못했지만 될때까지 진득하게 앉아 외우는건 할 수 있을것 같았다. 1년안에 무조건 붙어야 했다. 그 안에 못해내면 다시 알바시장으로 나가야한다.



120만원. 

첫월급이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학원강사를 알바로 했을때에도 그보다는 많이 받았던 걸 생각하면 첫 월급에 대한 기억은 충격이었지만, 누구나 알고있는 평생직장이 아니던가. 게다가 죽을때까지 연금도 주는,(정확히 얼마를 주는지도 모르겠지만..) 노후가 보장되는 이런 직업은 내 능력으로 그리 흔하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정말 운이 좋게 1년안에 공무원에 합격했다는걸 잘 알고 있기에 그마저도 감사히 생각했다.



공무원의 일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때가 되면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의 마력은 매일 아침 8시에 사무실로 출근하게 만들었다. 라떼이야기지만, 지금이야 9시 출근이 자연스러워졌는데 내가 9급때만해도 막내는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 쓰레기통도 치우고 과장님, 팀장님들 책상도 닦으며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민원인이 들어오면 커피를 타고, 1회용 컵 안쓰기 운동으로 사무실 물컵 닦는 일도 막내 일이었다.



태어나서 '시청'이라는 곳을 공무원이 되어서 처음 들어갔다. 다 나같은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시청을 내집 드나들듯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공무원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매일 신고접수되는 민원이 이리도 많은지.. 민원신고된 걸 처리하느라 정작 내 업무를 못할때도 많았고, 야근은 그야말로 생활이었다. 공무원이 '갑'이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데 들어와보니 웬걸.. 아니다. 공무원은 만년 '을'이었다. 위에서 치이고 민원인에게 치이면서도 어디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다. 매일 전쟁같은 일상이었지만, 고된 20대를 보낸 나에겐 이마저도 단비같은 일상이었다.



공무원이 처음 되었을때, 선배들이 나중에 공무원부부가 되면 중소기업이라 했다. 직급이 낮을땐 좀 퍽퍽해도 둘다 팀장급이상이 되면 먹고 살만큼은 된다고 했다. 그러다 한해 일찍 먼저 들어온 공무원 선배와 눈이 맞아 백년가약을 맺었다. 우린 부부공무원이지만, 아직 직급이 낮았다. 선배들이 말했던 팀장이 되려면 15년은 족히 더 근무해야 할 것 같다. 결혼과 동시에 9급에서 8급으로 승진했다. 승진은 했는데, 급여는 왜 그대로인 느낌일까.. 둘이 합해도 300만원이 되지 않았다. 야근수당까지 해야 겨우 300이 살짝 넘는다. 차떼고 포떼고나면 저축할 돈도 별로 없었다. 그래도 알뜰하게 살아온 습관덕에 저축도 하고, 남들 다 쓴다는 마통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출도 없다. 먼저 결혼한 동기가 다들 이렇게 사는 거라고 위로를 해준다. 그래도 언젠간 중소기업이 되겠지?



결혼한지 7년이 흘렀다. 지난 7년간 딱히 생활의 변화는 크게 없다. 아들이 하나 생겼고, 늦었지만 곧 딸도 생길 예정이다.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주거지가 바뀌었다. 집을 짓느라 대출이 조금 있지만, 전에 살던 아파트를 정리하면 대출을 왠만큼 정리할 수 있을것 같다. 아.. 그만 생각하자. 아침준비를 해야겠다. 주말이지만 삼시세끼는 꼭 챙겨 먹는다. 음.. 뭘 만들어야 하나.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여볼까? 마당에 나가서 고추나 따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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