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4 VR 헤드셋

첫 직장

by 허지현

K읍 사택에서 지내던 시절, 차도 없고 주변에 갈 만한 곳도 없어 매일 10평도 채 되지 않는 원룸에 박혀 지냈다. 나름 아늑한 공간이었으나, 주변에 딱히 갈 만한 곳도 없어서 쉬는 시간의 대부분을 허리가 배기는 싸구려 매트리스 위에 누워서 보냈다. 답답한 마음과 탁 트힌 공간에 대한 갈증이 점점 커지던 어느 날 문득 가상공간으로 그걸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VR, 정확히는 오큘러스 2를 구매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다. 뉴스에서 거창하게 얘기하던 것에 비하면 콘텐츠가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유튜브에 업로드되어있던 3D 영상들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경험을 안겨줬다. 세계의 관광지, 음악 공연 영상 등은 입체감이 확연하게 느껴졌고, 실제로 그 장소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스미소니언 같은 해외 박물관·미술관의 3D 전시 콘텐츠도 인상 깊었다. 방구석에서 지구 건너편 박물관까지 방문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시점이 이동하는 영상에서는 어지럼증이 꽤 심했다. 신체는 가만히 있는데 화면만 흔들리거나 회전하면 뇌가 뒤엉키는 느낌이 들었다. 레이싱 게임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결국 대부분의 게임은 시점 고정형이거나 직접 몸을 움직여야 했다. 가장 즐겨 한 게임은 유명한 비트세이버였는데, 두 컨트롤러를 들고 허공에서 팔을 휘두르며 플레이하다 보면 좁은 방 구조 탓에 자주 벽에 부딪히곤 했다.


지치면 다시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영화관 스크린처럼 띄워 좋아하는 밴드와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감상했다. 확실히 화면이 크면 몰입감도 달랐다. 그렇게 그 VR은 좁은 원룸의 탈출구가 되어주었고, 세상과의 얇은 연결고리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직을 하며 상경한 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박스에서 꺼내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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