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꽃 - 오시미 슈조 서평
오늘은 오시미 슈조의 만화 “악의 꽃”에 대한 서평을 해보고자 한다. 이 만화는 여러모로 참 인상 깊은 작품이다. 작가의 특이한 변태적인 성향부터 독특하고 뛰어난 연출법, 기이한 메시지와 전달 방식 등이 그러하다. 심지어 애니메이션화를 할 때는 굉장히 도전적이고 실험적으로 로토스코핑을 도입했다가 대차게 망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냥 특이하다는 감상을 넘어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전달 방식이 뛰어났고 재미있었기에 아직까지도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 덕에 만화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는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도 읽어볼 수 있었다. 아무튼 서론은 여기서 정리하고 본격적인 평을 해보겠다.
악의 꽃은 큰 맥락으로 살펴보면 주인공인 카스가 타카오가 마을에 대형 사고를 터뜨리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는 1부와 그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2부로 나뉜다. 작품 초반을 보면 카스가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은 진실되지 못한 채, 껍데기만을 가진 것처럼 묘사된다. 카스가의 경우에는 독서 자체보다 독서를 함으로써 특별해지는 자신에 도취되어 있으며, 그가 흠모하는 사에키 나에코는 모두가 탐하고 부러워하는 바른생활 소녀의 자신에 빠져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매도함으로써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나카무라 사와도 구역질 나는 마을이 아닌 “저 쪽”이라는 이상향으로 도망치고자 한다. 이런 인물들은 카스가의 타락적 행보를 따라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동참하게 되며,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마주 보게 된다.
하나 재밌었던 점은 나카무라와 카스가가 그리던 이상향인 “저 쪽”에 대한 개념과 상징주의자들의 철학과의 유사함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마을은 분지이며, 여기서 비롯된 답답함과 문제들은 뚜렷한 경계인 마을을 벗어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로 제지를 당하게 되고 그들은 이상향에 다다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는 주인공이 그토록 숭배하는 동시에 작품과 같은 이름의 시집, “악의 꽃”의 작가 보들레르의 생각과 유사하다. 보들레르를 포함한 여러 상징주의자들은 사회에 대한 환멸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사회를 관찰하고 교감하고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 밖에는 없었다.
카스가도 동일한 길을 걷는다. 중학교 시절에 마을에 저지른 대참사는 그뿐만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짓이겨 놓는다. 특히 화목했던 그의 가족은 마을로부터 도망치듯 이사를 간 뒤 자주 다투게 되고, 나에코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도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산다. 주인공 또한 주변 사람들과 적당히 맞춰주며 살아가지만 스스로가 저지른 잘못의 죄책감과 나카무라에 대한 그리움이 유령처럼 그를 뒤쫓는다. 그러나 그는 우연한 계기로 그처럼 책을 사랑하고 그런 자신을 남들과 다르다고 여겨 괴리감을 느끼는 토키와 아야를 만나고 친해진다. 각자 나름의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숨겨왔던 자신의 내면을 공유하며 둘은 교제하게 된다. 특히 카스가의 경우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토록 역겨움을 느끼던 ‘사람’이란 존재로부터 희망을 얻고 구원을 받는다. 물론 이후에도 그를 뒤따라 다니는 과거의 환영들이 있지만 그는 한층 강해진 마음으로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을 바로 보고 담판을 짓는다. 그러한 과정들 속에서 그의 내면의 악의 꽃은 추잡스럽고 괴기한 모습에서 그와 닮은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피어난다.
카스가 외의 인물들도 각자의 형식에 맞게 구원을 찾아간다. 사람에 따라 그 과정들은 안심, 비난, 체념, 애정 등의 형태로 다르지만, 결국은 모든 인물이 끔찍한 과거를 그저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마주 보고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며 성장한다.
필자처럼 잡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춘기 시절 한 번쯤은 사회와 인간관계, 그곳에 소속된 자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서 오는 자기혐오, 욕망에 대해 생각해봤을 것이다. 조금은 과격해도 그러한 주제를 내숭 없이 또렷하게 들이밀어 그 솔직함이 좋았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불편한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거기서 껍데기가 탄생한다. 나카무라가 카스가의 껍질을 도려내듯 작가도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무의식적으로 눌러 내리던 것들을 마주 보게 한다. 이 작품을 읽으며 자신의 욕망이 뭔지, 상처와 극복 방식, 구원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특히 다른 작품들에서도 늘 나오는 주제지만, 결국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구덩이 속에 밧줄이 던져진다 하여도 그를 붙잡지 아니하면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연출과 표현방식이 너무 좋았다. 총 11권의 전개 속에서 인물들의 신체 비율을 심리적 성장에 맞게 조정하며 그린 점은 정말 탁월하다. 그 외에도 세부적인 묘사, 대사, 표현 방식도 다른 작품들 속에서 찾기 쉽지 않다. 특히 책에 심취해있는 주인공과 그가 하는 생각, 대사, 적는 글 모두 스스로에게 빠져든 어설픈 사춘기 학생에게 너무 적합해 놀라울 수준이다. 필자 또한 그런 적들이 있었기에 잘 안다… 아무튼 그 외에도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손바닥에 있는 흉터로 나타내 손등에서 손바닥을 보이며 이야기를 푸는 장면이나 나카무라와 카스가가 마지막에 손바닥을 맞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인물이 많을수록 그들의 사연을 풀어내면 구차해지고 유치해지기 마련인데, 이 작품의 경우 초반의 많은 대사가 후반에는 연출로 치환되면서 그러한 문제점을 극복한다. 그 예시로 몇 년 만에 등장한 사에키가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과 어른이 되어 극복한 모습을 연인이나 배우자의 모습으로 대변해 나타낸 점도 굉장히 창의적이다. 아무쪼록 다시 읽어도 굉장히 좋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읽기 전, 악의 꽃이라 한다면 말 그대로 “악”이나 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자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서를 마치고 난 뒤 보아하니 악은 우리가 늘 생각하듯 추잡스러우나 그 나름의 미학이 있고, 그에 대한 여파와 결과물은 그보다도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고 느꼈다. 결국 개인의 성장은 좋든 나쁘든 하나의 악행으로부터도 시작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너무 악함을 나쁘게만 봐서는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