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하고 아끼며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집중하다
엄마는 당근을 싫어한다. 잡채와 김밥의 필수 재료인 당근을 넣지 않는다.
어릴 때의 나는 그래도 카레의 당근 정도는 먹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나도 당근을 먹지 않게 되고 엄마처럼 카레에도 잡채에도 당근을 넣지 않는다.
건강을 위해 당근은 꼭 먹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있으면 그래도 된다.
이게 아니면 안 된다는데, 살다 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다.
지금보다 젊었던 6년 전쯤, '버킷리스트'를 만들었었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리스트인 '버킷리스트' (Bucket list).
이는 '킥 더 버킷'(Kick the Bucket)에서 유래했다. 죄수의 교수형 집행 시 그가 디디고 있던 발밑의 양동이를 걷어차는 행동이다. 말하자면 내 발밑의 양동이를 차버리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보는 것이다.
그때 내가 버킷 리스트를 만든 것은, 제목이 아예 'The Bucket List' (우리말 제목은 '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인 영화를 봤던 것이 계기가 됐다.
살아온 배경이 다른 두 시한부 환자가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뛰쳐나가, 그들이 만든 버킷리스트를 함께 행동으로 옮긴다는 내용이다.
그전에는 나이도 차지 않았고 잘 모르기도 했다. 그리고 리스트를 만들어 동네방네 나 이런 거 할 거야, 이런 거 하는 사람이야 라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성격이기도 해서다.
검색을 해보니 대부분 버킷리스트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면서 살아오는 동안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어 하지 못했던 것들을 나열해 보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빨리 실천에 옮기겠다고 다짐한다. 100개를 만들어 실천해 보라는 사람도 있다. 버킷리스트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 즉 은퇴 후나 중년 이후에 보통 실행하게 된다. (간혹 젊은 세대들이 버킷리스트를 만들기도 하는데, 그건 어쩌면 '투 두 리스트' (To Do List)가 아닐까. 아직 양동이 위에 올라선 것도 아니니까.)
나름 생각해 놓은 것은 있었다. 파리 가기, 산티아고 순례, 드럼 배우기 등등. 어쩌다 보니 드럼은 조금 배우다 말았고 파리도 짧게나마 다시 가볼 수 있었다.
대부분 비슷하다. 여행 가기, 무언가 배우기, 어디서 살아보니. 거의 3대 버킷 리스트다.
결론은 셋 다 적잖은 돈이 든다는 것이다.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실행해 나가는 이들은 대단하다.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와 재력이 있다는 거다. 함께 할 동반자도 있고.
그리고 야부지게 SNS에 올려서 많은 '좋아요'를 받는다면 어쩌면 내가 정말 잘 살아왔구나 하며 감동받을지 모른다.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실행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이들을 부러워할 것이고, 반대로 실행은커녕 버킷리스트를 만들 꿈조차 꾸지 못하는 이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이다.
어떤 이들은 황혼육아에, 어떤 이들은 은퇴 후에도 재취업을 하여 다시 출근 대열에 합류하는 이들도 있다.
언론에 비치는 베이비 부머들의 풍요로운 노년생활. 실상은 보편적인 모습이 아닐 것이다.
약 열 개 남짓 항목의 버킷리스트를 최근에 버렸다. 처음 만들었을 때와 상황이 변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변했다.
바로 욕망에서 비롯됨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 안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것.
버킷리스트를 버렸다는 것은 내 욕구가 사라졌다는 것 혹은 욕구 충족이 내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건강 얘기를 하다가 '몸에 좋은 걸 먹으라는데 다 챙겨 먹고 있느냐'며 질문해 보았다. 친구들은 맛이 없어서, 외식을 많이 해서, 가족과 다른 식단을 짜기 힘들어서 등등의 이유를 들면서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때 한 친구가 몸에 좋은 걸 다 먹을 수는 없으니 몸에 좋지 않은 걸 먹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겠냐며 신박한 제안을 했다.
마찬가지다. 꼭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꼭 하고야 말겠다는 것들의 리스트 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황에 따라 이루게 되면 좋은 것이지 무리하게 꼭 해야만 한다는 억지스러움이 사라졌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말자부터 타인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 말자, 공공장소에서 눈살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하지 말자, 나이 든 인생 선배로서 품위를 지키자, 욕심이 나의 인성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자 등등. 쓰고 보니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들 부러울 만큼의 재력에, 시간과 건강까지 허락된 사람.
과시욕의 표현이든 결핍의 충족이든, 소비적이고 소모적인 일상으로 남의 이목을 끄는 사람이 실제로는 타인과 마찰이 잦고 안하무인이며 가족이나 지인들과도 원만하지 않은 관계를 이어나간다면, 그의 리스트 실행은 지극히 배타적인 것이며 타인의 찬사보다는 질타와 비난을 부를 것이다.
먹어야 할 것도 많고 가봐야 할 곳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고.
하지만 절제하고 삼가고 아끼는 태도로 삶을 이어 나가겠다, 절제하고 아낀 만큼의 몫을 타인들과 나누겠다, 소비하기 위해 쓸 시간에 나의 지성과 인성을 더욱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으로 리스트를 만든다면 이 얼마나 멋진 버킷리스트가 되겠는가.
당근을 넣지 않은 잡채도 맛있다.
이걸 안 하면 안 될 거 같고 그래서 부화뇌동하며 사는 것보다는 최소한 지킬 것은 지키고 공동체를 생각하며 여생을 보내고자 하는 태도는 존경받음에 마땅하다.
누군가 내게
이 나이 돼서도 참아야 하냐고, 이젠 이기적으로 살아도 될 나이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이가 훈장(勳章)은 아니며 인생은 함께 사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