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계획은 서서히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딸(만) 셋.
맏딸인 나와 막내는 4년 3개월 터울. 초중고 대부분 같은 같은 학교를 나왔고 어릴 때부터 늘 붙어 다녀서 그런지 가끔씩 서로 비교하기도 하고 비교되기도 한다.
아버지는 미국 드라마 '초원의 집'을 보면 우리 집 같다고 말했다. 주인공은 둘째 딸 멜리사 길버트였는데 비록 나중에 앞을 못 보게 되지만 맏딸의 미모가 가장 뛰어났다. 나는 수긍했지만 동생들은 수긍하기 싫었을 거다.
보통 여자 형제들처럼 우리도 만나면 다이어트 얘기, 머리숱 얘기, 피부 얘기, 건강 얘기들을 하지만 여기 덧붙여 내가 서울대에 간 것은 두고두고 가족 식사 자리의 단골 소재다. (사실 동생들도 재수 안 하고 훌륭한 대학교를 나왔음에도) 본가, 외가 자녀들 중 첫 번째 서울대생이라는 '레떼르'는 지금도 따라다닌다.
그날도 한가롭게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예전 같으면 감히 엄마 앞에게 찍 소리도 못했을 내가 갑자기 "엄마는 왜 그렇게 치맛바람이 심했어?"라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학교를 내 집처럼 들락날락하는 엄마가 무척 싫었던 나는 와인 한 잔의 취기에 힘입어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엄마와 내가 주거니 받거니 그때를 회상하며 에피소드를 끄집어내는 와중에 들려왔던 막내의 한 마디. 난 불쾌했다기보다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언니는 엄마 덕분에 서울대 간 거 맞잖아."
정말 엄마는 학교에 자주 왔다. 초등학교(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특히 초등학교 때는 교실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왔던 거 같고 중고등학교 때는 교무실로 곧바로 가니까 그 빈도를 잘 알 수가 없었지만 학기 초엔 꼭 왔었고, 간혹 엄마 오셨다고 선생님이 부르시면 교무실에 갔는데 엄마가 교무실을 떠나시면서 담임 션생님께 봉투 비슷한 것을 주는 걸 목격했었다. 목격하지 않았어도 엄마가 왔다 간 다음, 담임 선생님의 태도가 달라져서 모를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떠들고 있으면 나를 빼고 다른 친구들만 혼냈고, 손 들고 하겠다고 나서지 않아도 ㅇㅇ부장 같은 학급 간부로 지명했다.
사립 초등학교를 6학년 1학기까지 다녔다. 실제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이자 사립 초등학교인데 보통 '동네사립' 초등학교로 불린다. (항간에 경기, 계성, 은석, 리라 같은 유서 깊은 초등학교 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립 초등학교를 '동네사립'으로 부르더군요)
맏딸을 사립 초등학교에 보내며 큰 포부를 품었을 텐데 엄마의 바람과는 다르게 난 극도로 내성적인 아이였고 그저 수업 열심히 듣고 하라는 공부는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
스스로 반장 선거에 나간 적은 없는데 내 기억으로 그 학교는 회장과 부회장을 담임선생님이 지명했던 것 같고 난 순전히 성적+엄마의 지원으로 여자 회장이나 부회장을 했다.
시험을 자주 봤지만 늘 1등을 한 건 아니었고 특히 예체능 쪽에 약해서 미술과 체육 실기 점수는 '우' 받기도 어려웠다. 시험을 잘 못 봤던 날이면 학교에서 참았다가 집에 와서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언젠가는 하두 엉엉 울어서 엄마가 나를 위로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학기를 남기고 엄마가 여름방학 중에 이사를 갈 것이며 6학년 2학기 시작하는 날 전학을 가야 한다고 했다.
2차 성징이 시작되던 만 12세를 두어 달 앞둔 시점, 키도 훌쩍 크고 이성에 관심이 많아지고 반항도 싹트던 시기였다. 짝사랑하던 남자아이와도 이별해야 했다.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식 때 학사모도 쓰고 교장선생님 앞에 가서 상장도 받을 텐데.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크기는 작아도 2층집에 부족함 없이 살던 나는 도대체 어디로 왜 이사를 가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엄마는 한강 건너 남쪽, 영동으로 간다고 했다.
친구들도 당황해서 눈물 흘릴 새도 없었다. 편지하라고 주소를 적어 쥐어주고는 영동으로 떠났다.
이사를 간 아파트는 5층 짜리 아파트였고 성냥갑 같은 건물이 일렬로 늘어선 아파트들이 신기하긴 했지만 아스팔트 정비도 덜 된 낙후된(?) 동네였다.
전학 간 날 교장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거기서 공부 잘했구나. 그런데 여긴 한 반에 100명이 다돼 간단다. 50명 중에 1등 하는 거랑 100명 중에 1등 하는 거랑은 다르단다. 공부 열심히 하거라."
진짜 나는 그 반의 98번째 전학생이었고 그 후 분반이 되어 졸업 당시는 한 반에 80 명 정도 됐다.
이런 콩나물시루에 왜 전학을 왔을까.
당시는 70년대 여의도에 이어 영동(강남)에 민영 아파트 분양으로 대거 인구이동이 이뤄지던 시기였고 여기에 엄마의 복안(腹案)도 한몫을 했다. 맏딸 2학년 때 옆 동네로 이사, 두 동생은 다른 동네사립에 입학을 시키고 싶었는데 당시 둘이 다니던 유치원에서 단체로 입학 원서를 낼 예정이었으나 원장의 실수로 접수가 불발 (엄마 피셜)되어 엄마는 내심 속상했다고 한다.
안국역에 직장이 있던 아버지의 의견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후문.
환경이나 교육 수준이 여기가 더 나은 곳이라고 어른들이 말한들 귀에 들어왔겠는가.
예기치 않았던 친구들과의 이별은 가슴 아팠고 환경은 낯설고 그래서 졸업 때 까지도 전학 온 학교에 애착을 못 느꼈었지만 그 후로도 꾸준히 이어졌던 엄마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여전히 내성적이던 아이는 존재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새로 사귄 초등학교 친구들은 훗날 중고등학교 까지도 계속 학연이 이어지게 된다.
어쨌든 엄마의 선견지명과 교육열 그리고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우리 세 자매는 8 학군에 입성했다.
(세 딸들 중 특히 맏딸에게 엄마가 큰 기대를 했던 사연은 졸문 (拙文) "엄마의 꿈이지 내 꿈이 아니잖아"
https://brunch.co.kr/@93a1e00514bd488/135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생은 엄마의 맏딸에 대한 지대한 관심, 전폭적인 지원, 빈틈없이 딸을 조련했던 엄마의 스킬 (코칭, 감독, 효심 자극, 호소, 간혹 불안감 조성) 등등으로 결국 언니가 집안 최초 S대 입성이라는 쾌거를 이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 나는. 난 뭔데. 공부한 건 난데. 정말 죽은 듯이. 엄마의 기대에 엇나가지 않으려고 무지 애썼는데 진짜.
그걸 모르면서 말한 건 아닐 테고 당연히 엄마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일 것이다. 동생 말을 물고 늘어지면 엄마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것 같아 웃으면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렇지. 이건 엄마의 업적이다. 엄마의 트로피다.
'동네사립' 초등학교에서, 강남 8 학군 공립 초등학교로 전학, 그 후 8 학군 J 사립 여자 중학교 입학.
학교는 가까워야 한다는 게 엄마의 소신이었는데, 일차적으로는 일단 집이 멀면 통학 시간이 오래 걸려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부차적으로는 버스 안에서 남학생들을 만나면서 혹시나 연애(질)를 할 까봐라고 했다. 연애를 하면서 공부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결론? '집이 멀면 좋은 대학을 못 갈 수도 있다'는 엄마의 말씀.
엄마의 한결같은 바람으로 걸어서 5분 거리 중학교에 배정이 됐다. 물론 당시 내가 다닌 초등학교 여학생들은 모두 J여중에 배정됐다. 어쨌든 잘 됐다.
그렇게 난 공부 말고는 뭘 할 수도 없는, 뭘 잘하는지 알 수도 없는 아이로 성장해 나간다.
(다음 주 월요일에 발행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