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이 기록한 20년의 추격전
오랜만에 꿈을 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잤다. 머리만 대면 깊은 잠에 빠져드는 내게 불면증이란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거친 달리기를 마친 날이나 과식을 한 날이 아니면 뒤척임조차 없는 '딥 슬립(Deep Sleep)'의 연속. 그래서 나는 내가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는 나의 착각이었다. 1953년 렘(REM) 수면을 발견한 나다니엘 클라이트먼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매일 밤 여러 차례 꿈의 바다를 헤엄친다. 다만 나는 너무 깊이 잠든 나머지, 깨어나는 순간 그 기억의 그물을 놓쳐버렸을 뿐이었다.
그런 내게도 무의식의 수면 위로 유독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반복되어 온, '무언가에 쫓기는 꿈'이다.
꿈속의 나는 늘 도망자였다. 첫 번째 유형은 정체 모를 살인자에게 쫓기는 꿈이다. 장소는 늘 이국적인 부둣가, 얕은 수면 위에 위태롭게 설치된 나무 데크 위였다.
이상하게도 꿈속의 내 다리는 고장 난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 바닥을 디디려 해도 허공을 젓는 것 같았고, 50cm도 안 되는 장애물조차 넘지 못해 쩔쩔맸다. 잡히기 직전의 공포가 목을 죄어오면 나는 본능적으로 양팔까지 땅에 대고 '네 발'로 기기 시작했다. 따돌렸나 싶으면 어느새 뒤에 와 있고, 잡혔나 싶으면 겨우 거리가 벌어지는 지독한 평행선. 그 추격전에는 결말도, 승리도 없었다.
두 번째 유형은 조금 더 기묘했다. 상대가 명확히 보이는 숨바꼭질, 매번 대상은 달랐다. 가장 최근 기억에 남는 대상은 바로 '도플갱어'였다. 나는 내 존재를 위협하는 또 다른 나를 피해 숨고 도망쳤다. 첫 번째 꿈보다 긴박함은 덜했지만, 내가 나를 처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은 묵직한 잔상을 남겼다.
최근 몇 년간 잠잠했던 이 추격전이 며칠 전 '기출변형'의 형태로 다시 나타났다. 배경은 평소 내가 자주 달리는 중랑천이었다. 평화로운 하천 전체를 뒤덮을 만큼 거대한, 스타크래프트의 '땅굴벌레'를 닮은 괴생명체가 나타난 것이다. 기괴하게 꾸물거리는 괴수를 보며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쳤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이번 꿈은 과거와 두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첫 번째는 '가족'이었다. 늘 혼자 도망치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내 곁에 아내가 있었다. 고층 아파텔 베란다까지 얼굴을 들이미는 괴수를 피해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달렸다.
두 번째는 나의 '신체'였다. 더 이상 네 발로 기지 않아도 좋았다. 현실에서 매주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며 단련된 하체는 꿈속에서도 튼튼한 동력이 되어주었다. 심지어 난간에 매달려 아래층으로 탈출하는, 현실의 나로선 상상도 못 할 역동적인 움직임까지 선보였다.
현상 유지를 위한 몸부림을 멈추고
잠에서 깨자마자 이 생경한 감각을 잊기 전 제미나이(AI)에게 꿈 해석을 부탁했다. 돌아온 답변은 묵직했다.
"압도적인 공포로부터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사투."
AI는 내게 루이스 캐럴의 소설 속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효과(Red Queen Effect)'를 언급했다. 주변 세계가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라도 온 힘을 다해 뛰어야만 하는 상황. 나의 도망치는 꿈은 성취를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늘 현상 유지를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해 왔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매일 마음의 네 발로 기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늪에 빠졌을 때 필요한 건 격렬한 발버둥이 아니라 침착한 움직임이다. 나의 과도한 불안은 오히려 나를 더 깊은 심연으로 이끌고 있었다.
꿈 해석을 통해 나는 비로소 20년 넘게 나를 괴롭혀온 추격전의 정체를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한 가지 고무적인 변화를 발견했다.
비록 꿈속의 상황은 여전히 '도망'이었지만, 이제 내 옆에는 함께 손잡고 달릴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무의식 속의 내가 더 이상 자신의 신체를 무력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물리적으로 변했고, 나의 무의식은 그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나는 여전히 매일 밤 꿈의 바다로 뛰어든다. 하지만 이제는 눈을 떴을 때 축축한 공포 대신 단단한 근육의 잔상을 느낀다. 설령 오늘 밤 다시 괴수가 나타난대도 상관없다. 내 다리는 괴물보다 빠르게 달릴 준비가 되어 있고, 내 손은 사랑하는 사람을 절대 놓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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