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2 아사히신문을 읽고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참 열띠게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를 쳐다보며
"우리 지금 이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 거지?" 싶을 때.
애초에 이 이야기를 왜 시작했더라?
생각이 잘 나지 않을 때.
아니면 이런 경우도 있다.
A와 나는 20년 지기 친구다.
학창 시절 같은 반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이미 친구였다.
그러다 문득 서로에게 질문한다.
"우리 처음에 무슨 일로 친해졌더라? 기억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을 더듬다 보면
어느 지점에 도달하기도 하고,
영영 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일본에서는
そもそも(소모소모)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そもそも、なんでこの話になったんだっけ?
(애초에 이 이야기 왜 시작했더라?)
そもそも、私たちどうやって仲良くなったのか、覚えてる?
(우리 처음에 어떻게 친해졌는지 기억나?)
이처럼 일상에서 대화하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뱉던 이 단어가,
곧 있을 제51회 중의원 선거를 지켜보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단어가 되었다.
모두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そもそも.
한참 정신없이 선거유세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왜 하필 이 타이밍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정작 유권자들이 듣고 싶은 말은 해주지 않고,
그럴싸한 말들을 쏟아내며
우리는 더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여러 정치인들을 향해 아사히신문은 말한다.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는 누구나「そもそも」라는 물음표를 마음속에 품고 있을 것이라고.
そもそも는
애초에, 본질로 돌아가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체로 현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즉, 유권자들이 이 단어를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이야기는,"애초에(そもそも) 왜 우리가 투표장으로 향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에 대한 사회적 피로감이 일본 사회에 만연해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좋아.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알겠는데 그래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そもそも) 어떻게 해결할 건데?"
번지르르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정치인들을 향해,
유권자들은 문제의 본질에 대한 해결방안을 묻지만,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겉만 번지르르한 포장지(What)는 많은데,
정작 그 안의 내용물(How)은 비어있다.
개인적으로 아사히신문을 읽으며 재미있다고 느꼈다.
원래 일본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좋아도 크게 기뻐하지 않고,
싫어도 잘 티가 나지 않는 것이 일본인들이다.
길을 걷다가 발을 밟혀 아픈데도,
당신이 가는 길에 내 발이 있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겨 미안하다며
상대방에게 'すみません(스미마셍)'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아닌가.
상대방의 발에 밟히고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そもそも'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침묵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시사한다.
일본 사회는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정치, 사회, 경제, 국제관계 무엇 하나 시원하지 않다.
한국인들의 촛불시위를 부러워하면서도
결코 광장에 나서지 못하던 이들이 そもそも라는 단어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많은 것들이 쌓여 있다는 증거다.
살다 보면 불편한 대화일수록
빙빙 돌려서 말할 때가 있다.
알기 쉬운 예로,
남녀가 싸울 때 가장 피하고 싶은 바로 그 문장.
"내가 다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 말해봐. 뭘 잘못했는데?"
때로는 본질이 무엇인지 알면서 회피하기도 하고,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빙빙 돌려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What에 대한 논의만으로는
결코 How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일본 유권자들이
정치인에게 던지는 'そもそも'는,
적당히 미안하다는 말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상대에게
'뭘 잘못했는지 제대로 말해봐'라고
차갑게 묻는 질문과 닮아 있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일본인들이
そもそも라는 물음표를 꺼내 들었다는 것은,
적당한 사과와 모호한 약속 뒤에 숨겨진
진짜 본질을 대면하겠다는 선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싶으리만큼
꼬여버린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겉으로 그럴싸해 보이는 화려한 변명이 아니라
애초에(そもそも)라는 본질을 묻는 용기일 것이다.
당신이 회피하고 싶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そもそも의 단초를 찾게 되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