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

요즘 들어 어쩐지 참외가 달더라니

by 모색

얼마 전 이마트 트레이더스에 들러서 참외 한 봉지를 샀다. 너무 맛있어서 금방 다 먹고 딱 하나만 남겨놓았는데, 남은 참외를 보다가 문득 외증조할머니가 떠올랐다.

충북 내수에 사신 터라 나와 내 동생에게 '내수할머니'라고 불리신 당신은 바구니에 그 샛노랗고 수박보다도 달콤한 과일을 가득 담아와 나를 부르시곤 했다.
할머니는 참외를 깎으면 꼭 반을 잘라 은색 놋수가락으로 속을 박박 긁어내곤 했는데, 좁쌀 같은 씨가 다닥다닥 달린 속이 긁어내어져 하얀 그릇에 차곡차곡 모아져 가는 동안, 그 앞에는 애타게 그 일련의 반복된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내가 앉아있었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하얀 그릇을 내어주고 당신은 이제 민둥산이 되어버린, 단맛이라곤 모조리 박피되어 버린 또 다른 하얀 그릇만을 드시곤 했다. 그럼 어린 나는 게눈 감추듯 당신의 노고를 삼켜버린 뒤 또다시 다음 참외를 기다리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내수할머니에 대한 내 기억은 이게 전부다. 머리가 커지면서부터는 몇 년 전부터 노환으로 누워계신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할머니를 뵌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난 오늘 증조할머니의 부고소식을 듣고 나서 머리가 멍해졌다.


요즘 들어 어쩐지 참외가 맛있더라니..

할머니를 기억할 때면 참외 속을 박박 긁어주시던 모습만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참외를 볼 때마다 난 당신이 아주 당연하게 어린 증손주를 위해 하염없이 베푸셨던 따스함과, 딱딱한 과육을 드시며 애쓰셨던 사랑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어른이 된 이제는 안다. 참외는 속이 제일 달고 맛있다는 걸.

엄마에게 영정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내일은 내가 할머니께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달고 맛있는 과일을 깎아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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