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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공지마 Feb 17. 2022

[한자썰18] 風, 위험이라 할 순 없다

리스크와 풍험, 그리고 언어

風(바람 풍)은 갑골자에서 봉황과 돛을 결합한 상형이다.(1, 2, 3) 갑골에 봉황은 높이 솟은 벼슬을 뽐내면서, 화려한 오색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 올라, 큰 배의 돛을 한껏 부풀린다. 바람이 부는 원리를 알 수 없었던 고대인들은, 봉황이 날갯짓을 해서 바람이 생긴다고 믿었다. 風(바람 풍)은 강 위에 떠있는 돛단배를 나아가게 하는 봉황의 아름다운 날갯짓이다. 주 1)


전국시대를 지나면서 전설의 새, 봉황은 그 크기가 급격히 작아지고, 급기야 돛에 둘러 싸인 초라한 꼴이 된다. 대붕(大鵬)이 한 번 날갯짓하면 물결이 3천 리 튀고 9만 리 오른다 했는데, 그 꼴이 말이 아니다. (4, 5)


이는 원시 토템이 사라지기 시작한 증표다. 구전으로만 들어 왔단 봉황을 봤다는 사람은 허풍쟁이 뿐이었고,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상상 속 동물일 뿐인 봉황은 글자 속에서 쪼그라들어 그 모양조차 흐릿해지고, 현실 속의 부푼 돛은 더욱 크게 그려져 글자의 주 상징이 된다(4~9).  주 2)


금융회사는 리스크 관리를 굉장히 중요시하는데, 금융산업은 원체 변동성이 크기 때문이다. 금융회사는 이 변동성으로부터 손해를 입을 수도 이익을 낼 수도 있는데, 이와 같은 불확실성에 노출(Exposure to uncertainty)된 상태 또는 정도를 리스크(Risk)라 부른다.


우리는 이 리스크를 '위험(危险)'이라고 번역해서 쓴다. 危(위태할 위)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나타내는 글자라서, 위험은 'Danger'에 가깝다. 따라서, 의미 상으로는 리스크에 적합하지가 않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실무적으로 리스크라는 외래어를 그대로 쓸 때가 훨씬 더 많다.


중국인들은 리스크를 풍험(風险)이라 부른다. 외국어 그대로를 쓰기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중국인들이니 우리처럼 리스크를 그대로 쓸 리가 만무하다. 다만, 원래 뜻을 잘 살려야 하니, 전문가들이 특별히 고민을 했을 듯하고, 그들은 리스크의 본질을 바람에서 발견해 낸 것이다.  자국 언어와 글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그 정확한 사용에 천착하는 중국인들이 놀럽고 부럽다.

조석과 계절에 따라 바람의 방향과 세기와 온도가 각기 다르고, 그 마저도 산이나 강이나 들에 따라 또 저마다 다르다. 예상할 수 없이 수시로 변하는 風(바람 풍)은 리스크의 변동성을 닮았다.


바람은 사람에게 많은 이로움을 주지만 때로는 막대한 손해를 끼치기도 한다. 바람은, 배를 저절로 나아가게 하고, 전답에 곡식들을 수분시키고, 뜨거운 여름 더위를 식힌다. 하지만, 폭풍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 가고, 메뚜기를 몰아와 작물을 헤치고, 차가운 북풍은 살을 에는 추위로 떨게 한다. 風(바람 풍)은 리스크의 양면성을 닮았다.


사족, 風의 간체는 风이다. 마침내 전설은 자취를 감추었고, X자로 봉인까지 당한다. 중국 공산당은 한 동안 전통의 배격에 극성을 부렸다. 그 광기가 간체 风에서 살짝 엿보인다. 번체 風은 간체가 필요할 정도로 복잡하지가 않다.


북경 소재 금융합작법인에 발령을 받아 맡게 된 부서가 리스크본부였다. 중국말로는 풍험본부(風险本部, Feng Xian Ben Bu(펑시앤번부))란다. 왜 풍험(風险)인지를 현지 직원들에게 물었더니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결국 감탄하고 말았다.

'아아, 맞다 맞아. 리스크는 바람(風)이다.'

한 자 한 자 뜻이 있는 표의문자인 한자의 뛰어난 조어(造語), 조의(造意) 능력을, 나는 중국법인 출근 첫날 깨쳤다. 언어는 생각을 제한한다. 따라서, 언어에 따라 생각의 넓이와 깊이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풍험은 중국인의 상상력의 산물일까, 언어의 기능성의 산물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어차피 똑같은 외래어라면 우리도 리스크 대신에 그냥 풍험이라 하면 어떨까 공상을 해봤다. 그러다가, 우리말로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살짝 고민도 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그대로 리'스'크'가 훨씬 더 좋은 것 같더라!


주) 1. 風(바람 풍)과 鳯(봉황 봉) 발음이 똑같이 Feng(펑)임. 風이 원래 봉황을 가리켰다는 해석도 있음.

2. <장자莊子 내편 소요유內篇逍遙遊>, [네이버 지식백과] 대붕[大鵬] (한시어사전, 2007. 7. 9., 전관수)

3. [네이버 지식백과] 리스크란? (대학생을 위한 실용 금융, 김용하, 김진영, 박진우, 최철, 오성수, 강전, 박정은)


p.s. 다음 한자썰은 借(빌릴 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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