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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공지마 Mar 03. 2022

[한자썰24] 醉, 취하니 술이다.

그래도, 훈훈(醺醺), 존존(尊尊), 준준(蹲蹲)까지만…!

醉(술 취할 취) : 酉(술/닭 유) + 卒(마칠/죽을 졸)

醉(술 취할 취)가 酉(술/닭 유)과 卒(마칠/죽을 졸)의 합자이다. 술을 과하게 마셔서 마치 죽은 사람 꼴이 된 상태를 가리키는 자가 醉다.(1) 장기판에 졸(卒)은 모든 말들 중에서 가장 느리게 움직이고, 한 번 전진하고 나면 후퇴를 못하는 유일한 말이다. 용맹스럽지만 곤궁하다. 자기 목숨을 걸고 방어막을 치거나 상대 말을 잡기 위한 미끼로 쓰이고, 궁을 몰아세울 때도 독자 공격은 불가능해서 다른 말과 협공을 해야만 하니 어엿한 공을 세우지도 못한다. 갸륵하지만 처량하다.


醉(술 취할 취)는, 우리가 술에 취하면 장기판 졸 신세로 전락하기 쉬우니, 항상 조심을 해야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卒(마칠/죽을 졸)은 옛날 사병, 특히 보병들이 입던 군복이다. 갑골자를 보면 꺽쇠처럼 생긴 투구와 X자로 얼키설키 엮인 전투복이 허술하기가 짝이 없다.(1, 2, 3) 그 모양이니, 전쟁터에 끌려 나간 병사들이 여간해서 살아 돌아오기가 어렵지 않았겠나! 그 새김말에 ‘마치다’, ‘죽는다’가 더해진 연고가 그러하다.


십만, 백만 대군이 참패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하는 역사적 기록들이 이 글자를 통해서 설득력을 더한다. 장판교 앞에서 장비가 내지른 한 마디 호통에 조조 대군이 기겁을 해서 줄행랑을 놓았는데 자기끼리 짓밟혀 죽은 군사의 수가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는 이야기가 연의(演義)에 허풍만은 아니지 싶다.


술(酒)에 취(醉)해서 졸(卒)한 정도는 혈중 알코올 농도에 따라 행태가 제 각각 다른데, 그 천태만상을 가리키는 한자들이 수두룩한 게 신통방통할 따름이다. 이미 수천 년을 음주가 인생에 속속들이 스민 증좌다. 주 1)


[0.05~0.1%),  얼굴이 붉어지고 눈꺼풀이 살짝 묵직해진다. 기분이 약간 업이나 다운되어 정상과 다른 감이 든다. 체온이 약간 상승한다는 느낌과 함께 얼굴이 조금씩 얼근해진다. 입술과 혀가 순해져서 말을 더듬던 이는 매끄러워지고, 늦던 이는 빨라진다. 실제 그렇던 말든 말의 논리가 평소보다 정연 해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만만해 보이지만 0.03%부터 1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 벌금형이다. 훈훈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 훈훈(醺醺(술 취할 훈)) : 약간 취해서 얼근함.

   cf. '훈훈(薰薰(향풀 훈)하다'와 동음이어(同音異語)


[0.1~0.25%), 말이 많아지고 소리의 톤이 올라간다. 평소보다 팔이나 머리의 움직임이 커지고, 감정 고조가 심해진다. 혀가 꼬이기 시작하고, 술을 마시다 입 밖으로 흘리기도 한다. 화장실을 자주 가기가 시작된다. 자기 잘난 척이 부끄럽지가 않고, 말에 예의를 잃게 되며 동어반복(同語反復)한다. 평상시 드러내지 않던 생각을 여과 없이 표현한다. 어떤 일에 의견이 서로 다르거나 털어놓은 속내가 불편한 내용이면 자칫 말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 주화(酒話) : 술기운을 빌어하는 말

- 독존(獨尊) : 자기 잘난 맛, 나르시시즘 탐미

- 혹언(酷言) : 모질고 심한 말

- 생흔(生釁) : 사이가 멀어 짐


[0.25-0.35%), 안면이 창백해지고, 오심과 구토, 보행 불능에 의식이 혼탁해진다. 상대방 말이 아득하게 들리고 집중해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헌데도 고객은 끄덕이고 감탄으로 맞장구까지 친다. 동공이 풀리고 눈꺼풀이 자꾸 주저앉는다. 앉은 자세를 꼿꼿이 유지하기 어려워 건들건들한다. 흥이 발동하면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순간순간 짧은 수면 상태에 빠진다. 다투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동단결, 껴안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카타르시스 또는 열반의 경지다. 물아일체이고 술이 나를 마시는 상태다. 취권이 무공을 발휘하는 단계다.


- 준준(蹲蹲) : 덩실덩실 춤을 춤

- 감면(酣/醉眠) : 술 취해 잠이 듦

- 후주(酗酒) : 정신 놓고 말하고 행동함

- 추태(醜態) : 더럽고 지저분한 짓


[0.35-0.5%),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호흡마비가 오고, 심하면 쇼크로 죽을 수도 있다. 토사를 제어하지 못해 질식하는 경우도 있다. 술이 술을 마시고 내가 완전히 사라지는 단계다.


- 명정(酩酊) : 사지와 정신을 놓아 버림 주 2)



사족,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醉가 두 가지 양상으로 쓰인다고 해석한다. 허신(許慎)이 살던 한나라 때까지는 그랬나 보다.


- 음주적량(飲酒適量), 술을 알맞은 량으로 마셔서 흐트러지지 않은 정도를 지키다.

- 음주과량(飲酒過量), 몸이 능히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마셔서 무너진 뚝처럼 수습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는 그저 후자의 뜻으로 쓰일 때가 너무 많다. 술푼 일이다. 嗚嗚!


주) 1.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명정(酩酊)에 대한 설명 참조

2. 명정은 위 술 취한 모든 단계를 아우르는 일반적인 말이다. 다만, 명정(銘旌)이 죽은 자의 관 위에 덮은 붉은 천임을 고려할 때, 동음이어이기는 하지만 대상의 상태가 비슷하니 섞어서 써도 괜찮겠다. 해음(諧音)으로 말장난 잘하는 중국인들이 그냥 뒀을 리 만무할 테니까!


p.s. 다음 한자썰은 醫(의원 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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