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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공지마 Jun 15. 2022

[한자썰58] 國, 태생의 어두운 그림자

囗(나라 국), 口(입 구) 그리고 戈(창 과)

國(나라 국) : 囗(나라 국) + 或(혹 혹, 나라 역)


國(나라 국)은 주대 금문을 보면 지금의 或(혹시 혹)이다. 금문 或은 사면으로 쳐진 담 바깥에 다시 방책(防栅)이나 해자를 두르고 창을 든 채 경계를 서있는 모습이다.(표 1~4) 或자에서 口 모양 아래위 一이 그 외곽 방호물의 흔적이다. 或은 분봉지에 파견된 제후가 고향에서 데려 온 가솔들과 추종자들을 토착민으로부터 보호하고 지배권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분리하여 설정한 영역을 뜻했다. 그곳은 정치와 군사의 중심으로 그 안에 살면 국인(國人)이고, 밖에 살면 야인(野人)이라 나누어 불리는 차별적 공간이기도 했다. 주 1)


그 공간은 의심이 끊이지 않는다. 이방인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토착민의 항거와 경쟁관계에 놓인 이웃 나라 간자들의 염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킨다고 지키지만 결코 지켜지지 않은 공간이 바로 그곳이다. 或이 '혹시'라는 뜻으로 쓰이게 된 이유가 그렇다.


여러 세대가 교체되고 가문이 분화되면서 봉건제 초기에 작동하던 종법(宗法)은 구속력이 약화되었고, 봉국(封國)의 지배체제가 그 자체로 고착화되어 중앙으로부터 이탈하려는 내부의 힘을 쌓는다. 왕과는 인척이라 하기에 촌수가 아련해졌고, 이쪽저쪽 눈치 안 봐도 될 만큼 힘도 길렀으며, 다른 봉국들도 입장이 다르지 않은지라 왕을 열심히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로 뭐라 꾸짖지도 않는다. 그때 마침, 주(周)가 북방민족에게 패퇴해서 동천하여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자리 낙읍(洛陽)에서 동주(东周)를 세우는데, 왕권이 이미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 중앙의 통제력이 유명무실하게 되어 버린다. 비로소, 군웅할거의 춘추전국 시대가 열린다. 주 2)


이 시기에 國이 등장한다. 國은 或(나라 역)에 囗(나라 국)을 겹친 글씨다. 或(나라 역)은 이방인 지배층과 토착민 피지배층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진 나라다. 그런데, 이런 나라로는 나라 간에 끊임없는 총력전이 벌어지는 춘추전국의 약육강식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국가의 개념을 지리적으로 확장해야 하고, 이방인과 토착민이라는 종족주의를 완화해야 했다. 종족주의를 극복하고 함께 터 잡고 사는 강역을, 함께 수호해야 할, 동일한 이해집단으로서 나라의 개념이 바뀌어야 했다. 이것은 전란의 시대를 맞닥뜨린 지배층과 피지배민이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공통의 전략이기도 했다. 이 개념이 실현된 나라를 표현한 글씨가 바로 國이다. (표 5~12)

춘추전국 이후부터 國이 나라를 뜻하게 되자 或은 그 원래의 뜻이 도태되어 '혹시'라는 뜻으로 쓰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표 6, 9) 그 초기에 或이 나라와 영역의 뜻으로 계속 혼동하여 쓰이자, 土(흙 토)를 더해서 강역의 의미를 명확히 한 域자가 만들어지기도 한다.(표 7, 10) 그러므로, 或, 域 그리고 國, 이 글자 셋은 다 그 태생이 하나다. 다분히 봉건적이고 계급적이며 정치적인 글자들이다.


다행히 간체자 国(나라 국)에서 희망이 보인다. 国은 玉(구슬 옥)을 가꾸고 소중히 여기는 땅이다. 굳이 점을 찍어 王(임금 왕)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봉건성을 탈피한 것이다. 玉는 구슬, 옥(보석), 아름다운 덕(德), '아름답다', '훌륭하다'의 뜻이다. 가치를 품고 있고 문화적이다. 가히 김구 선생님께서 문화강국론으로 꿈꾸셨던 나라다.


사족, 만리장성은 북방민족을 막기 위해서 쌓은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이 도망 못하게 만든 가두리라는 설도 있다. 양 떼에 울타리를 세우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 울타리는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일까, 지금은 돌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털을 벗기고 잡아먹을 양들이 흩어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일까?


실제로 만리장성을 여러 곳을 가서 봤지만, 장성의 높이가 생각만큼 그렇게 높지 않다. 대체로 지세가 가파른 곳은 낮고 반대인 곳은 높지만, 전체적으로 보통의 성만큼 공성이 어려운 정도의 높이는 아니다. 만일, 적이 험준하지만 성벽이 낮은 곳을 여러 갈래 대군으로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침략해 들어 올 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리장성은 공성 장비를 갖춘 대군의 다지점 동시 공격을 막기에는 결코 적절치 않다. 반면, 무장하지 않은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갖추어진 장비 없이 장성을 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몇몇이 몰래몰래 아름아름 넘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겠지만...!


國자에 그 실마리가 있다. 囗(나라 국)으로 나라의 강역을 넓혔지만, 戈(창 과)은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다. 지키는 대상이 囗(나라 국)이 아니고 여전히 口(입 구)이고, 창끝은 백성을 향하고 있다. 그러니, 囗(나라 국)은, 口(입 구)에 사는 소수자들이 온갖 기득권(戈(창 과))을 동원해 아무리 무거운 조(租)와 세(稅), 역(役)을 지워 죽을 지경을 만들더라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씌워 놓은 울타리인 것이다. 백성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걷어 재끼고 벌어 재끼는 것이 백성을 위한 것일 리 만무하다. 國의 태생에 그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니, 그리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뜻으로 우리는 나라를 國이라 부르고, 거기에 가족처럼 지내라고 家자까지 붙여서 국가(國家)라 일컫는다. 어서 빨리 国으로 가자! 哼哼。주 3)


주) 1. 或이 국인(國人)들의 영역을 뜻할 당시에는, 야인(野人)들의 영역을 포괄한 전체 영역을 邦(나라 방)이라 불렀다. 邦은 '경계에 있는 땅' 또는 '수목이 무성한 터전'을 가리키는 글씨로 지금의 國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邦은 國에 비해 정치적이지 않고 중립적이다. 그리고, 부속 글자들이 갖는 수목, 땅, 마을이라는 개념은 민중들의 삶에 더 다가가 있다. 나중에 한나라 태조 유방(劉邦)의 이름과 겹치게 되면서 더 이상 나라의 뜻으로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한나라 태조 탓에 우리는 좋은 말, 邦을 잃었다. 국산 영화를 방화()라 부르는데, 어감과 달리 그리 나쁜 말이 아니다.

2. 종법(宗法) 종족의 결합과 질서, 존속을 위한 친족 제도의 기본이 되는 법도로 주나라  성립되었다. 유럽 중세의 봉건제는 왕과 제후 간의 쌍무적 계약관계였다면, 중국 고대의 봉건제는 혈연에 입각한 종법적 관계였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 맞지만, 세월이 흐르면 피도 옅어진다. 혈연, 지연, 직연 따위로 어떻게 국가 대계를 이어 가겠는가!

3. 조(租)는 백성으로부터 관리가 받는 것이고, 세(稅)는 관리로부터 국가 또는 왕이 받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전자는 노동소득세나 소비세이고 후자는 법인세나 사업소득세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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