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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공지마 Jun 12. 2022

[한자썰57] 靈, 본질을 가린 허상들…

능소화 흐드러진 흙돌담 빈 길에서 맑은 靈을 보다.

靈(신령 령): 霝(비올 령)+巫(무당 무)


靈(신령 령)은 춘추금문으로 보면 霝(비올 령)과 示(보일 시)를 합한 글자다.(표 1) 霝이 큰 비를 나타내고 示가 제단의 상형(象形)이다. 그러니, 춘추금문 靈(신령 령)은 타는 가물에 신령에게 기우제를 통해서 비를 빌거나 그 기도가 통해서 비가 쏟아지는 장면이다.1)


신령의 역사(役事)와 인간의 기원(祈願)이 접속하는 강신(降神)을 구하느라, 흩날리는 비처럼 어지러운 춤을 추는 무당(巫)을 가리켜 선인들은 靈(신령 령)이라 했다. 靈은 보이지도 않는 ‘신령’을 뜻한게 아니라 원래는 그저 인간에 속한 ‘무당’이었다.


마른 하늘에 돌연 비를 내리는 능력을 아무나 갖지는 못한다. 비가 오는 시(時)와 절(節)을 오랫동안 익히고, 천기의 변화에서 강우의 법칙을 읽어 내는 영민함을 가진 자라야만 가능하다. 그 지혜를 도무지 알지 못하는 보통의 사람들이 그 자들을 숭상하여 금문 靈으로 이름 붙인 것이다.


주목할 부분은, 춘추에서 전국을 지나면서 나타난 靈 하부의 자형 변화다. 기왕의 제단(示)이 사람을 뜻하는 壬(북방 임)과 巫(무당 무)로 대체가 되는데, 장면을 무당으로 의인화시켜 놓고 보니 말 못 하는 제단 보다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어울리겠다 싶어서 기어이 그렇게 바꿔놓은 것이다. (표 2, 3, 4) 주 2)


신령은 원래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아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으니, 믿음이 옅은 사람들이 자꾸만 우상(偶像)을 세운다. 성황당이 울굿불굿 해지고, 교당의 땅이 넓어지고, 첨탑은 높아지고 무당은 행색이 교만해진다. 우상은 현상에서 사물, 그리고 다시 사람으로 변신하는데, 가뭄 후에 내리는 해갈의 단비에서 그 비가 떨어지는 제단으로, 그 제단에서 춤추는 무당으로 신령의 자취를 옮겨가면서 찾아다닌 靈 또한 그렇다.


무당이 처음에는 제단에 내리는 비가 신탁임을 고백하고 자신을 낮추며 그저 목민(牧民)을 하더니, 그 행사가 오래 반복되자 무당은 교만해지고 백성이 제 절로 혹세(惑世)시킨다. 무당은 그 사이를 틈타서 이제 자신이 없이는 비가 없다라고 겁주며 무민(誣民)하기에 이른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꼭 먼 옛날 고대중국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온갖 종교들이 하는 짓이 무당 같고, 무당은 곳곳에 공연(公然)히 숨어들어 우리 인생을 현혹하고 있다. 역사의 반복과 퇴행이 한심하다.


사람들이 인지(認知)가 열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에 이성이 깃들자, 본질이 아닌 무당(巫)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알게 된다. 마침내, 靈자는 무당의 꺼풀을 벗어던지고, 그 무당이 자기만 접한다 거짓하던, 신(神), 혼(魂), 백(魄), 정신(精神), 정기(精氣) 그 자체를 직접 뜻하게 된다. 급기야, 무당의 헛됨에 놀아난 자들은 그 자책을 담은 誣(속일 무 ; 무당의 말처럼 헛되고 거짓되다)라는 글자까지 만드니, '誣(속일 무)의 파생'과 '靈(신령 령)의 의인성 탈피'는 巫(무당 무)의 망령됨을 극복한 인간 이성의 계몽이라는 점에서 그 맥락이 같다.


사족, 灵(신령 령)은 靈의 간체자인데, 언 손(彐)을 불꽃(火)에 쬐여 따뜻하게 데우는 모습이다. 송(宋) 대부터 있었으나 거의 쓰이지 않다가 현대에 간체화를 통해서 부활했다.


불에 손을 쬐이면 따뜻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당연한 원리를 깨우치지 못하니 신비하게 느껴지고, 신령이라 부른다. 靈은 그 알지 못하는 것들에 붙인 미상의 꼬리표다. 결국, 알고 나면 뻔한 灵일뿐인데, 지레 겁먹고 신령이라 부르는 것이다.


신령은 산에도 들에도 강에도 하늘에도 땅에도 죽은 조상에게도 있다. 신령이 그렇게 흔해 빠진 이유가 뭘까? 모든 사물과 현상에 깃들어 있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원리 없이 생기고 운행하는 것들은 없다. 그 신령을 두고 내 신이네 네 신이네 싸우고 있는 모습은 우습기가 그지없다. 그런 의미에서 예전 조상들의 너그러운 신령 사상은 지금보다 훨씬 지혜롭다. 본질이 무엇인지 잘은 알지 못하나 내 보기에는 그것이 본질에 훨씬 더 가깝다.


灵이 靈을 대체한 것은 단순히 쓰기 편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만물과 인간을 움직이는 원리의 단순함과 보편성, 그리고 따뜻함 때문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 원리의 목적이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 방식은 에너지의 순환이니 기본적으로 따뜻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灵은 그런 원리들의 따뜻함에 대한 상징이리라!


마침내 灵에는 사람이 사라졌다. 靈에서 사람을 떨어낸 灵이 참 영민하다. 어찌 보면 사회주의적이기도 하다. 哈哈。


주) 1. 霝(비올 령)의 하부에 口(입 구) 셋은 큰 빗방울을 나타낸다. 고대에 셋은 많다는 뜻이다. 그러니, 霝(비올 령)는 아마도 소나기다.口 셋은 시끄럽다는 뜻도 함께 있으니 그 비가 장하게 쏟아진 게 틀림없다.

2. 壬(북방 임)은 그 유래가 분명치 않다. 땅과 하늘을 잇는 북쪽 하늘의 별을 가리킨다 해서 '북방' 또는 '아홉 번째 천간'의 의미로 주로 쓰인다. 여기서는 신(하늘)과 인간(땅)을 수직으로 관통하여 소통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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