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창밖으로 올려다본 하늘이 높고 푸르렀다. 난 집을 나설 채비를 했다. 신발장 문을 열었다. 앞 코를 세운 운동화들이 '오늘은 나야'라며 서로 운동화 끈을 흔들며 나에게 손짓했다.
난 짧고 굵은 팔을 그들이 아닌 샌들과 슬리퍼가 있는 오른쪽으로 뻗었다. 10월이 되면서 신발장 문 앞에서 귀퉁이로 이사한 분홍색 샌들을 집었다. 입추가 지났지만, 여전히 8월 같은 날씨 때문이었다.
3년 전 텔레비전을 보며 발톱을 깎다 홈쇼핑에서 판매 중인 분홍색 샌들을 주문했다. 주로 어떤 옷차림에도 무난하게 어울리는 희거나 검은색을 신던 내가 색깔 있는 샌들을 산거다. 스테이크용 칼끝처럼 뾰족한 발을 위해서였다. 나이와 함께 뱃살은 늘어나는데 발은 점점 말라갔다. 다섯 발가락 중 제일 힘세고 굵어야 할 엄지발가락도 시들시들했다. 난 화난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럽게 엄지발톱을 자르다 홈쇼핑에서 판매 중인 선명한 분홍색 샌들에 꽂혔다. 지금껏 성질 한번 내지 않고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열심히 걸어가 준 초라해진 발에 화사한 신발을 신겨주고 싶었다. 그렇게 내게 온 샌들은 3번의 여름을 함께했다.
가죽으로 된 분홍색 샌들 끈이 살 없는 발등 위를 감쌌다. 난 집을 나섰다. 늘어난 신발 끈이 엄지발가락을 자꾸만 샌들 밖으로 삐져나가게 했다. 헐렁한 채 그대로 걷다 나뭇가지에 발이 걸렸다. 앞으로 쏠리는 몸을 잡으러 양팔을 폈다. 하늘로 날아가듯 흔들어대며 넘어질 뻔한 순간을 간신히 피했다. 덕분에 샌들 밖으로 나가려는 엄지발가락 끝만 긁혔다. 눈물처럼 피가 맺혔다. 난 손가락으로 긁힌 발가락 끝을 닦았다. 상처를 낸 게 미안해서인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있는 내 손가락 굵기 정도인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지팡이를 해도 될 정도의 길이였다. 난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걷던 길을 계속 걸었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솜 공장으로 갔다면 면봉이라도 되었을 건데. 길거리에 버려져있다니. 짠한 생각에 난 '사랑의 매'라 부르며 나뭇가지를 집으로 가져갈까 했다. 거실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화분에 나뭇가지를 흔들며 한마디 하고 싶어서.
'짜식이 내가 사랑을 그렇게나 주는데 자꾸만 내 눈을 피하고 고개를 숙이다니.'
실없는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워 어금니가 보이도록 혼자 웃으며 걸었다.
8월 같은 10월에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며 여전히 푸르름을 뽐내고 있는 나무들 사이를 걸었다. 등을 타고 땀이 흘렀다.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걸었다. 나뭇가지를 쥔 손가락 사이로도 땀이 흥건했다. 땀이 흘러 촉촉한 나와 달리 말라버린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커다란 나무에 그대로 붙어있었다면 촉촉하고 튼튼했을 건데. 어떤 사연으로 꺾여 말라버렸을까. 난 하늘과 어울리며 싱싱함을 자랑하는 나무들 사이로 부러진 나뭇가지를 던지며 중얼거렸다. '다음 생엔 오래도록 붙어 살아남으렴.' 잠깐이지만 혼자 걷는 길에 함께 해 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걷다 보니 발가락사이로 자꾸만 돌멩이가 들어왔다. 자동차 트렁크에 있던 운동화를 꺼내 샌들과 바꿔 신었다. 늘어진 끈과 닳아진 신발 바닥에 붙은 흙을 털었다. 운동화를 빼낸 곳에 샌들을 뒀다. 3년을 나와 함께하며 선명하던 제 색깔을 잃어버린 샌들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고개를 숙였다.
'넌 달라. 나와 내년 여름에도 함께할 거야. 고개 들어.'
난 자동차 트렁크를 닫고 다시 길을 걸었다.
흙과 손잡은 운동화는 샌들과 달리 엄지발가락을 꽉 잡아줬다. 발바닥에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푹신한 감촉을 선사했다. 조금 전보다 걸음 속도가 빨라졌다. 이파리들 사이로 구름 같은 양 떼들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활짝 열린 이파리들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우뚝 선 나무와 나뭇가지들과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가 보다. 계속 흔들거린다. 곧 단풍이 들고나면 하늘이 아닌 땅으로 떨어져 올 한 해를 마무리할 건데. 푸르기만 한 이파리들은 내일을 모르는지 나와 하늘을 향해 계속 흔들어댄다. 난 붉게 물들어 활활 타오른 후 흙과 함께 겨울잠에 빠질 잎들에 손을 흔들었다. 튼튼한 나뭇가지와 눈부신 햇살이 있어 내년 봄에도 새로 피어날 거니 걱정하지 말라 했다.
나도 이 길을 따라 끝까지 걷다 보면 이파리들을 따라 긴 여행을 떠나려나. 여기까지 걷게 해 줬던 샌들도 앞으로 걷게 해 줄 운동화도 같이 걸어봐야겠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 내게 나무들 사이로 던졌던 나뭇가지가 따라오며 아는 척을 한다. 난 뒤돌아 나뭇가지 손을 잡고 점점 가팔라지는 길을 따라 걸었다.
누군가의 꿈이었을, 한 번쯤은 날아오르고 싶었던 곳. 늘 자리를 지키며 웃고 울며 날 바라만 보고 있는 곳. 이파리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나와 조금씩 가까워졌다.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난 운동화 앞부리에 걸린 돌멩이를 집어 선명한 색깔을 자랑하는 하늘을 향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