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끝이 너에게 닿기를
가슴에 새긴 새겨질 날 들
대문을 열며 환하게 웃어주던 사람이 가느다란 빛줄기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난 허둥대며 리모컨으로 전원을 껐다. 다시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 중앙에 가느다란 줄이 나타나더니 이내 사라졌다. 시커먼 화면만 보였다. 화장실 가는 것도 참고 드라마를 보던 난 신경질 가득한 손놀림으로 셋톱박스 코드를 뽑아버렸다.
거실 맞은편 집 부엌에 불이 켜졌다. 혹시 저 집도 텔레비전에 문제가 생긴 걸까. 난 건너편 집을 힐끗거리면서 셋톱박스 코드를 다시 꽂았다. 전원을 켰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뱀이 담 넘어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화면이 다시 나왔다.
다행이다. 대문을 열고 환하게 웃던 주인공이 손님을 집안으로 들여놓아서. 둘이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다. 몇 장면과 대사는 놓쳤지만 서로 오해가 풀린 것 같다. 드라마는 순조롭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며칠 전 ‘지지직’ 소리를 내며 화면이 흔들리던 텔레비전에 문제가 있긴 있나 보다. 내일은 게으름 떨치고 꼭 서비스센터에 연락해야겠다. 짜증이 묻어나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난 다시 드라마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들어 갔다.
드라마가 끝났다.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가 무르익던 두 사람 사이로 모래바람이 불면서 다음 주 월요일을 기대하라는 자막과 음악이 흘러나왔다. 혹시 또다시 화면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던 난 텔레비전 오른쪽 귀퉁이를 쓰다듬으며, ‘오늘은 여기까지.’라며 텔레비전을 껐다.
그해 12월. 출장에서 돌아온 넌 두통을 호소하며 누워있었어. 텔레비전에선 열린 음악회가 시작되었고. 소파에 누워있던 너에게로 다가간 아이는 실로폰을 내밀었어.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던 넌 자리에서 일어나 실로폰 채를 잡았어. 난 멜로디언 호스를 입에 물고 손가락은 건반 위에 올린 채 너와 아이를 쳐다봤고. 너와 나에게 악기를 맡긴 아이는 장난감 마이크를 흔들며 소리 질렀어. 들리니. 기억은 나니.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아마 텔레비전에선 ‘선구자’가 나왔을 거야. 거실 가득 ‘일송정 푸른 솔’과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손을 잡고 춤을 추던 해 질 녘 평화로운 시간이었어.
유치원에서 배웠다며 어깨, 팔, 다리 온몸으로 춤을 추던 아이. 실로폰 채로 아무 음이나 뚝딱거리던 너. 입이 아파 호스는 빼고 건반만 두드리던 나. 셋이 또렷하게 한 화면에 잡혀야 했던 그날 밤이 흐릿해진다.
그때 서비스센터를 불러 고쳤어야 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고쳤다면, 고칠 수 있었다면. 그날 밤이 오늘까지도 지속되었을 텐데. 그랬다면 악기를 두드리고 노래와 춤을 추며 이웃들에게 '시끄럽다.'는 쪽지를. 아파트 관리실로부터 '민원이 들어왔습니다.'라는 전화를 받았을 건데. 그래도 그렇게만 된다면….
텔레비전처럼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면 12월 그날이 나타날까. 난 눈을 살며시 감았다.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은 순간 가물거리던 장면이 보일 것 같다. 꺼진 텔레비전에서 '지지직' 소리가 들렸다. 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텔레비전 화면을 뚫고 실로폰 채를 든 손이 나왔다. 그 손아귀엔 마이크 들고 있던 손도 함께다.
난 그 두 손을 잡았다. 주름진 손이 펴지며 짧은 손가락이 길어졌다. 손가락 끝이 닿았다. 손들이 웃었다.
'내 기운이 네게로. 내 사랑이 네게로. 내 마음이 네게로.'
흐릿해 잘 보이지 않던 화면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셋이 꽉 찬 텔레비전 화면이 12월 밤과 어깨동무하며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