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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뱃살공주 Dec 19. 2024

푸른 하늘 은하수

모독 冒瀆을 날리며

광장의 함성이 바람을 타고 자동차 뒷좌석까지 왔다. 조금 전까지 핸드폰 진동이 울린 듯한 떨림으로 나도 함께했던 곳이다. 자동차 뒷좌석에 자리 잡은 우렁찬 소리를 광장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룸미러로 바라보니 소리에 묻힌 깃발, 피켓, 촛불들이 광장을 꽉 채웠다. 여전히 남아있는 여진에 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운전대도 흔들거렸다. 난 두 손에 힘을 주며 앞만 바라보고 운전했다.


황색에서 적색으로 바뀐 직진 좌회전 동시 신호등 앞에 차를 멈췄다. 신호등에 달이 걸려있다. 직진 신호에 걸려있던 달이 녹색 불과 함께 좌회전 쪽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난 달을 따라 좌회전으로 달렸다. 어느 쪽으로 가도 집으로 가는 길은 있으니깐. 좌회전으로 들어선 도로는 어둑한 골목길이었다. 짧은 순간 환한 4차선 도로로 가지 않은 걸 후회했다. 난 운전대 잡은 손에 긴장을 보냈다. 드문드문 자리 잡은 가로등과 자동차 전조등이 앞장섰다. 좁은 골목에 주차된 차들을 피해 집으로 돌아왔다. 긴장한 손을 맞잡고 비벼줬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은 고요했다. 광장의 열기에 젖어있던 난 냉동실 문을 열었다. 생선구입을 게을리하는 엄마를 위한 딸내미 선물인 손질된 냉동 고등어가 보였다. 한 개를 꺼내 오븐에 넣었다. 가스 불을 켰다. 불꽃이 광장의 깃발처럼 흔들렸다. 바람에 묻혀 험했을 나를 위해 고등어는 푸르스름한 등과 하얀 뱃살을 뜨겁게 달궜다. 서서히 온 집안이 고소한 고등어구이 냄새로 물들었다. 전자레인지에서 알람이 들렸다. 냉동된 흰쌀밥이 따뜻하게 녹았으니 어서 식탁에 앉으라고 나를 부르는 소리다. 광장의 소리와 다르게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는 12월 추위를 잊게 했다.


난 그날 저녁 다른 날과 다르게 밥을 더 먹었다.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켤까 하다가  12월 밤바람이 맞고 싶어졌다. 김장 김치에 고등어까지 먹었지만, 뭔가 설명하기 힘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 입이 여전히 뭔가를 씹고 싶어 했다. 배는 부르지만 부르지 않은 그런 허전한 느낌이었다.  신발장 문을 열었다. 오늘 함성 가득했던 광장과 다르게 조용히 집을 지킨 검은색 운동화를 꺼냈다. 종일 밖에서 서성거렸던 내 발가락과 발등 그리고 발목이 운동화로 이어졌다. 난 부엉이 인형이 걸린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지난여름 아이들 목소리에 행복했을 물 분수대와 놀이터를 지나 아파트 후문 쪽으로 걸었다. 겨울 가고 봄이 오면 아이들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리라. 경비실 불빛이 환했다. 경비 아저씨와 눈인사를 나눴다. 편의점 앞 건널목 앞에 섰다. 찬 바람에 열기가 식은 내 머리가 요동쳤다. 앞으로 나가려는 발과 싸웠다. 바람을 맞으며 난 결정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추우니 얼른 집으로 돌아가. 아니야 배가 너무 부르니깐 둘레길을 걷다 들어가.’

머리가 발을 이겼다. 추위를 탓하며 난 집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나니 오늘 하루가 꽉 찼다. 난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책장 앞으로 갔다. 요 며칠 동안 나를 옭아맨 생각과 동일한 책 제목이 눈에 띄었다. 오래전 읽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박완서 작가의 『모독 冒瀆』이다. 작가가 티베트와 네팔을 다녀온 후 1997년도에 펴낸 기행기다.

나도 티베트는 꼭 가고 싶었다. 주변에 갈 만한 사람이 없어 아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눈과 가슴으로만 다녀오고 말았다. 책을 펼쳐 읽어 내려갔다.

조금 전 12월 추위를 탓하며 걷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작가는 이렇게 말을 건넸다.

"네팔에서 어쩌다 우리나라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는 걸으러 온 사람이다.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타는 사람보다도, 나는 사람보다도, 뛰는 사람보다도, 달리는 사람보다도, 기는 사람보다도, 걷는 사람이 난 제일 좋다"라고.


이 어두운 밤이 지나면 환하고 푸른 하늘을 가진 아침이 올 거다. 책 읽기를 마친 난 작가가 '제일 좋다'라고 하는 걷는 사람이 되고자 팔다리를 흔들며 몸을 풀었다. 날씨와 하늘빛 탓을 하며 걸음이 멈춰질까 봐 발목도 돌렸다


광장의 성난 함성은 없을 것 같은 곳. 하늘 아래 첫 동네일 것만 같은 책 속 사진 나에게 다정한 손짓을 했다. 쉼이 숨이 되는, 비움이 꽉 찬 공간. 느림이 빠름을 앞서가는, 부족이 만족일 것만 같은 그곳.

나에겐 당신이. 당신에겐 내가 그런 곳일 것도 같다. 나도 그곳에 있고 싶다.

책장에 책을 꽂는데 목이 메었다. 가시 정리가 잘 된 고등어를 먹었는데도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아팠다. 숨을 길게 뱉어내는데 내 주위에 움직이는 것은 내 눈물뿐이었다.

난 눈물을 닦으며 광장에 가득 찼던 함성이 은하수가 된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거실 커튼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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