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 꿈속에서
온몸이 나른하게 퍼지는 오후다. 햇살이 좋아 거실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었다. 들고 있던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졸던 눈을 떴다. 텔레비전을 볼 때는 반짝거리던 눈이 책만 들면 감긴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보는 사람도 없는데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볼륨 6에 맞춰둔 라디오 소리만 집안을 맴돌고 있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이미 무게를 늘린 눈꺼풀이 나를 짓눌렀다. 무거움을 이기지 못한 난 읽고 있던 책을 의자에 던져둔 채 집을 나섰다.
온 동네가 벚꽃 잔치 중이다. 향긋한 꽃 냄새를 따라갔다. 바람이 불어 미세먼지가 없는 거리는 환했다. 걷다가 만난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샀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잔치가 한창인 동네 둘레 길로 걸어갔다. 커피를 흘릴까 봐 천천히 걸었다. 길 양옆에 우뚝 서있는 벚꽃들이 오래간만에 거리에 나선 날 반겼다. 난 꽃들에 홀린 듯 나무 아래 의자 한쪽에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람 덕분에 본래의 색깔을 찾은 하늘이 쨍했다. 한참을 올려다봤더니 눈이 부셨다. 고개를 숙여 땅바닥으로 눈을 돌렸다. 노란 민들레들이 날 바라보고 있다. 이파리를 활짝 벌리며 웃고 있다. 군데군데 상처가 보여 짠했다.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보던 난 잊고 있던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커피 위를 꽃잎 몇 개가 떠다니고 있다. 내가 급하게 마실까 봐 벚꽃나무가 꽃잎들을 보내다니. 난 행복감에 게슴츠레한 눈으로 벚꽃나무를 바라보며 꽃잎과 어우러진 커피를 마셨다.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듯이 바람이 불었다. 바람과 함께 꽃잎들이 춤을 췄다. 의자와 날 휘감는 하얀색과 분홍색깔 벚꽃잎들의 춤사위에 반한 난 그들을 따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를 펄럭이며 지상(地上)을 바라보던 천사가 말했다.
"내가 인간들에게 뺏고 싶은 건 딱 하나야. 그들의 삶이 유한(有限) 하다는 거."
삐딱하게 흘겨보며 내가 물었다
"죽음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당신이 가슴 한쪽을 떼내는 아픔이 뭔지는 알아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으면서 인간의 죽음을 부러워하다니."
불쾌한 대답이었는지 천사가 싸늘한 얼굴로 변했다. 천둥번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 귀를 때렸다.
"그래서 부럽다는 거지. 너흰 변화(變化)라는 걸 성장(成長)이라고 부르면서 바뀌잖아. 난 몇 천년을 이 모습으로 이러고 있는데."
아 그거였구나. 우리가 점점 늙어가는 걸 변화, 성장이라 생각하는구나.
"너 무한(無限)이 얼마나 지루한 지 아니? 그래서 우리 천사들에겐 거울이 없어. 변화라는 게 없는데 거울이 무슨 필요가 있겠니? 매일 같은 시간 속에 갇혀 있는 이곳은 아름답지도 않아."
천사 말이 끝나자마자 종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던 천사가 날갯짓을 했다. 그 바람에 벚꽃잎에 둘러싸인 난 지상으로 돌아왔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돌아온 난 민들레 이파리 속에 누워있다. 깃털보다 100만 배나 무거운 나를 이파리 속으로 데려다 놓다니. 황홀한 기분에 들떠 나대는 내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낮이나 밤이나, 날씨에 상관없이 늘 하늘을 받치고 있는 민들레. 난 하늘바라기인 그들 사이에 누워 같은 곳을 올려다봤다.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 같은 곳. 가깝지만 아주 먼 곳. 내가 있는 이곳엔 끝이 있어 더 아름다우니 사는 동안 예쁜 삶을 살아라고 일깨워 주는 곳. 한참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겨드랑이가 간질거렸다.
'아! 맞다. 한때 1004 광희쌤 이었지. 내 집으로 날아가려고 날개가 조금씩 자라느라 간질간질하구나.'
이렇게 봄날이 가고 있다. 깜박 졸다가 꿈을 꾸고 일어난 내게 더위가 아는 척을 한다. 난 더운 날을 맞이하기 위한 첫 번째 준비물로 냉동실에 물을 얼리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식탁 위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큰 이모! 이번 광자매 여행에 하얀 티 한 장 데려가시죠. 엄마 편에 보낼게요.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언니 딸 목소리에 잠이 먼저 여행을 떠났다. 커플티를 준비했다는 조카 말에 콧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고마워. 이모는 여행 가서 시원한 맥주 한잔 살게."
전화를 끊고 나니 퇴직 한 내 맥줏값을 챙기고 있는 장미가 생각났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데로 5월이 아닌 4월의 장미에게 사랑 가득 담은 편지를 써야겠다. 난 장미꽃 만발한 편지지를 준비하리라.
라디오에서 들리는 기타 소리가 온 집안을 밝히며 평온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
*제가 1004가 된 사연입니다.(부디 너그럽게 용서하시길^^)
매년 첫 수업 시간이면 이름 풀이를 했었습니다. 어느 해이던가. 넉살 좋은 녀석이 '光姬'라는 이름을 이렇게 풀어줬습니다. 전 그 별명에 맞춰가려 매일 노력(ㅎㅎ)했고요. 그날 이후 수업 시간마다 겨드랑이가 간질거려 아이들에게 '날아가기 일보 직전이니. 쌤 말 좀 제발 듣자.'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답니다.^^
"빛나는 계집이라. 쌤! 미모가 특출 난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어디서 빛이 나고 있다는 겁니까? 제가 아는 빛이 나는 여자는 하늘에 사는 천사뿐인데. 에이! 쌤 그냥 천사 하세요. 천사 광희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