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틈이 귀를 행복하게 해 주던 충전식 라디오다. 난 안방으로 뛰어가 보조배터리를 가져왔다. 충전을 시작한 라디오를 켰다. 충전기를 꽂았는데도 전원 버튼이 켜지지 않는다. 라디오조차도 내 나이만큼 늙어 힘이 드나 보다 생각했다. 조용한 라디오를 쓰다듬으며 충전이 되고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난 그동안 내 귀를 행복하게 해 준 라디오에게 오늘은 충전이라는 휴식을 줘야겠다 중얼거리며 텔레비전을 켰다. 고속도로 교통사고 소식이 흘러나온다. 가족 병문안 가던 모녀 경차와 음주 운전자 역주행 차량 충돌사고다. 경차 조수석에 있던 운전자 엄마는 사망이란다. 난 슬픈 소식이 듣기 싫어 채널을 돌렸다. 곧 매진이 예상된다고 외치는 홈쇼핑에 꽂혔다. 판매하는 것을 살까 말까 망설이는데 멈췄던 라디오에서 소리가 들린다. 홈쇼핑 호스트 목소리에 흔들렸던 난 얼른 텔레비전을 껐다. 지갑에 든 돈이 굳었다.
나이 든 라디오는 이제 충전이 되었나 보다.
멈췄던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난 음악에 맞춰 몸을 앞뒤 좌우로 흔들며 부엌으로 갔다. 왼쪽 어깨가 찌릿하다. 며칠 전부터 조금 불편했던 부위다. 이 나이엔 흔한 오십견이라 생각하고 그냥 뒀었다. 음악소리에 몸을 흔들다 아픈 어깨 부위를 건들었는지 견딜만했던 통증이 날 움찔하게 했다. 찜질팩을 찾아 왼쪽 어깨에 올렸다. 어깨 통증이 어느덧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참을 정도를 넘어선 통증에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따뜻한 팩과 함께 난 침대에 누웠다.
몇 년 전 자전거 사고로 다친 왼쪽 팔꿈치가 어깨보다 더 욱신거렸다.
난 해가 쨍쨍한데 비가 오려나 하며 창 밖을 바라봤다. 자전거를 타고 지금은 돌아가신 친정엄마께 다녀오다 돌멩이에 자전거 앞바퀴가 걸려 하늘을 붕 날았다. 약 5초 정도 기절했던 자전거 사고였다. 정신을 잃었지만, 헬멧 덕분에 왼쪽 팔꿈치 개방골절만 있었다. 팔꿈치 밖으로 튀어나온 뼈는 감염이 예상되어 제거해야 했다. 대신 인공 뼈를 삽입했다. 수술 후 의사 선생님은 팔꿈치가 완전히 펴지지 않을 수도 있다며 조심스럽게 장애를 언급했다. 난 의사 선생님 처방대로 죽을 만큼 힘들게 재활치료를 했다. 수술 후 15도 정도 굽었던 팔꿈치가 지금은 0도 다. 하지만 완치 후 한 번씩 참기 힘들 정도로 찾아오는 왼쪽 팔꿈치 통증이 내일의 날씨를 예측하게 했다.
라디오에선 여전히 음악 소리가 들린다.
내 몸도 라디오처럼 충전이 가능해 원상 복귀된다면 자전거 사고 전으로 돌리고 싶다. 나이 60을 넘기면서 사고로 다친 부위 말고도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어나고 있다. 60년 넘은 기계를 생각한다면 부품을 몇 번이나 바꿨을 건데. 사람 몸이라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불편하고 아픈 게 맞지. 난 하나 둘 내 몸이 무너져가는 것을 받아들였다. 너무 빠른 속도로 무너지긴 싫어 난 내가 만든 5잘을 지키려 했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움직이고, 잘 자고, 잘 푸는 게 5잘이다. 가장 평범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것들이다. '무엇을 풀어?'라고 가끔 친구들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스트레스를 풀어야지'라고 나는 대답했다. 친구들의 묘한 미소가 폭소로 변한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던 난 그들에게 무얼 상상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워있던 난 조금 가라앉은 통증에 따뜻하게 데워진 왼쪽 어깨와 팔꿈치를 쓰다듬었다.
찜질 팩과 침대와 나는 오늘 한 몸이 되야겠다.
몸이 라디오처럼 ‘충전 완료’는 안 되겠지만 따뜻하게 쉬면 통증이 덜하겠지. 종일 우리 집을 따뜻하게 해 준 태양이 퇴근할 때쯤 천천히 목 어깨를 깨우고 팔다리를 움직여봐야겠다. 살아오느라 닳고 닳았을 내 몸을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살살 다루면 한동안 통증이 덜 할 것 같다. 난 ‘혹시 내일도 통증이 여전하면 병원에 가던지 아님 곧 매진이 예상된다던 홈쇼핑 건강식품을 사 먹어 보던지’ 생각에 빠져들었다. 조금 덜 하면 그냥 지나쳤을 통증에 생각이 많아졌다는 건 나이 들어 죽음이란 단어에 가까워졌다는 의미다. 지금껏 살아오며 받았던 감사함, 고마움, 행복함 등 좋은 것들을 이전 보다 더 많이 세상으로 내 보내야겠다. 나한테 좋았던 것들이 세상에 나와 더 많은 것을 만들며 우리를 미소 짓게 할 거다. 거기에 힘을 보탠 난 점점 더 나이 들어가고. 나이 듦을 늙음이 아닌 익어감으로 표현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난 '익어감'이란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라디오에서 충북 보은의 60대 농부가 24년째 28t에 이르는 쌀을 기부하고 있다는 미담이 들린다. 통증을 잊게 해주는 소식이다. 이런 분이야말로 잘 익은 사람이다.
잘 익은 과일에서 나오는 영양성분과 과즙은 글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많고 맛있다. 하지만 그것과 비교도 안 되는 기막힌 맛을 간직한 것은 충북 보은의 60대 농부와 같은 잘 익은 사람이다. 내 곁에 이름도 모르는 잘 익은 사람들이 있어 나도 하루하루 맛있게 익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