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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뱃살공주 Feb 12. 2024

익어가는 중입니다.

겨울이 있어 봄이 온다.^^

오늘 아침 라디오방송을 듣던 중 갑자기 소리가 멈췄다.

틈틈이 귀를 행복하게 해 주던 충전식 라디오다. 난 안방으로 뛰어가 보조배터리를 가져왔다. 충전을 시작한 라디오를 켰다. 충전기를 꽂았는데도 전원 버튼이 켜지지 않는다. 라디오조차도 내 나이만큼 늙어 힘이 드나 보다 생각했다. 조용한 라디오를 쓰다듬으며 충전이 되고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난 그동안 내 귀를 행복하게 해 준 라디오에게 오늘은 충전이라는 휴식을 줘야겠다 중얼거리며 텔레비전을 켰다. 고속도로 교통사고 소식이 흘러나온다. 가족 병문안 가던 모녀 경차와 음주 운전자 역주행 차량 충돌사고다. 경차 조수석에 있던 운전자 엄마는 사망이란다. 난 슬픈 소식이 듣기 싫어 채널을 돌렸다. 곧 매진이 예상된다고 외치는 홈쇼핑에 꽂혔다. 판매하는 것을 살까 말까 망설이는데 멈췄던 라디오에서 소리가 들린다. 홈쇼핑 호스트 목소리에 흔들렸던 난 얼른 텔레비전을 껐다. 지갑에 든 돈이 굳었다.   


나이 든 라디오는 이제 충전이 되었나 보다. 

멈췄던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난 음악에 맞춰 몸을 앞뒤 좌우로 흔들며 부엌으로 갔다. 왼쪽 어깨가 찌릿하다. 며칠 전부터 조금 불편했던 부위다. 이 나이엔 흔한 오십견이라 생각하고 그냥 뒀었다. 음악소리에 몸을 흔들다 아픈 어깨 부위를 건들었는지 견딜만했던 통증이 움찔하게 했다. 찜질팩을 찾아 왼쪽 어깨에 올렸다. 어깨 통증이 어느덧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참을 정도를 넘어선 통증에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따뜻한 팩과 함께 난 침대에 누웠다.


몇 년 전 자전거 사고로 다친 왼쪽 팔꿈치가 어깨보다 더 욱신거렸다.

난 해가 쨍쨍한데 비가 오려나 하며 창 밖을 바라봤다. 전거를 타고 지금은 돌아가신 친정엄마께 다녀오다 돌멩이에 자전거 앞바퀴가 걸려 하늘을 붕 날았다. 약 5초 정도 기절했던 자전거 사고였다. 정신을 잃었지만, 헬멧 덕분에 왼쪽 팔꿈치 개방골절만 있었다. 팔꿈치 밖으로 튀어나온 뼈는 감염이 예상되어 제거해야 했다. 대신 인공 뼈를 삽입했다. 수술 후 의사 선생님은 팔꿈치가 완전히 펴지지 않을 수도 있다며 조심스럽게 장애를 언급했다. 난 의사 선생님 처방대로 죽을 만큼 힘들게 재활치료를 했다. 수술 후 15도 정도 굽었던 팔꿈치가 지금은 0도 다. 하지만 완치 후 한 번씩 참기 힘들 정도로 찾아오는 왼쪽 팔꿈치 통증이 내일의 날씨를 예측하게 했다.


라디오에선 여전히 음악 소리가 들린다.

내 몸도 라디오처럼 충전이 가능해 원상 복귀된다면 자전거 사고 전으로 돌리고 싶다. 나이 60을 넘기면서 사고로 다친 부위 말고도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어나고 있다. 60년 넘은 기계 생각한다면 부품을 몇 번이나 바꿨을 건데. 사람 몸이라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불편하고 아픈 게 맞지. 난 하나 둘 내 몸이 무너져가는 것을 받아들였다. 너무 빠른 속도로 무너지긴 싫어 난 내가 만든 5잘을 지키려 했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움직이고, 잘 자고, 잘 푸는 게 5잘이다. 가장 평범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것들이다.  '무엇을 풀어?'라고 가끔 친구들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스트레스를 풀어야지'라고 나는 대답했다. 친구들의 묘한 미소가 폭소로 변한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던 난 그들에게 무얼 상상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워있던 난 조금 가라앉은 통증에 따뜻하게 데워진 왼쪽 어깨와 팔꿈치를 쓰다듬었다.


찜질 팩과 침대와 나는 오늘 한 몸이 되야겠다.

몸이 라디오처럼 ‘충전 완료’는 안 되겠지만 따뜻하게 쉬면 통증이 덜하겠지. 종일 우리 집을 따뜻하게 해 준 태양이 퇴근할 때쯤 천천히 목 어깨를 깨우고 팔다리를 움직여봐야겠다. 살아오느라 닳고 닳았을 내 몸을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살살 다루면 한동안 통증이 덜 할 것 같다. 난 ‘혹시 내일도 통증이 여전하면 병원에 가던지 아님 곧 매진이 예상된다던 홈쇼핑 건강식품을 사 먹어 보던지’ 생각에 빠져들었다. 조금 덜 하면 그냥 지나쳤을 통증에 생각이 많아졌다는 건 나이 들어 죽음이란 단어에 가까워졌다는 의미다. 지금껏 살아오며 받았던 감사함, 고마움, 행복함 등 좋은 것들을 이전 보다 더 많이 세상으로 내 보내야겠다. 나한테  좋았던 것들이 세상에 나와 더 많은 것을 만들며 우리를 미소 짓게 할 거다. 거기에 힘을 보탠 난 점점 더 나이 들어가고. 나이 듦을 늙음이 아닌 익어감으로 표현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난 '익어감'이란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라디오에서 충북 보은의 60대 농부가 24년째 28t에 이르는 쌀을 기부하고 있다는 미담이 들린다. 통증을 잊게 해주는 소식이다. 이런 분이야말로 익은 사람이다.

익은 과일에서 나오는 영양성분과 과즙글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많고 맛있다. 하지만 그것과 비교도 안 되는 기막힌 맛을 간직한 것은 충북 보은의 60대 농부와 같은 잘 익은 사람이다. 내 곁에 이름도 모르는 잘 익은 사람들이 있어 나도 하루하루 맛있게 익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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