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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뱃살공주 Mar 26. 2024

3월 25일 1시 22분

연금이 입금되었다

<사학연금지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랫동안 매월 17일이 월급날이었다. 휴일과 겹치는 날엔 2~3일 정도 이르게 입금되었다. 자동이체 일을 월급날에 맞춰 18일 이후로 설정했다. 이체 일이 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월급통장에서 돈이 쏙쏙 빠져나갔다. 퇴직과 동시에 17일 월급도 끝났는데 난 생각을 못 했다. 가스 요금, 운전자 보험 미납이라는 문자를 받고 나서야 머리가 번쩍였다. 월급통장을 확인했다.  '아뿔싸!'  잔액이 두 자릿수다.


먼저 퇴직한 분들이 '퇴직 전 지출 정리를 해'라 했다. 난 퇴직 전 꼼꼼하게 ‘지출 내역을 엑셀로 정리해야지’ 했는데 잊었다. '혼자 쓰는 건데 일단 써보고 하지 뭐'라는 마음에 미루다 잊은 거다.

직장인으로 마지막 월급인 2월 입금액이 통장에 남아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미납이라는 문자가 겨울바람처럼 내 머릿속을 때렸다. 난 핸드폰을 열어 은행에 접속했다. 지출 내용을 살폈다. 도대체 어디에 돈을 썼을까? 과하게 먹은 것도 물건을 산 것도 없는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즐겨 먹던 ‘소떡소떡’을 먹듯 날마다 돈을 썼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 더니 내가 그 말 모델이 된 거다.   

  

통장 잔액을 본 후 마음이 심란했다. 과소비도 아닌데 과소비한 사람이 된 기분이다. 새벽 1시가 넘도록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렸다. 핸드폰 알림이 들렸다. 통장 알림을 설정해 뒀는데 입금을 알리는 소리다. 이 시간에 입금이라니. 놀란 난 핸드폰 문자를 확인했다. 1시 22분 ‘사학 연금 급여’라고 찍혀있다. ‘아! 오늘이 25일이구나’ 퇴직 후 첫 연금일이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입금된 금액이 날 허전하게 했다. 이젠 성과급, 보너스, 복지비가 없다. 오로지 연금으로만 살아야 한다.  

    

지출 내용을 엑셀로 정리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노트 한 페이지에 적었다. 보험금 지출이 가장 컸다. 딸아이와 둘이 된 후 가장 먼저 보험 가입을 했다. 혹시 내가 무슨 일이 생기면 딸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것저것 꼼꼼하게 따진 후 가입해야 했었는데 무작정 가입한 게 문제였다. 매달 나가는 보험금이 월급의 40%까지 된 적도 있다. 그때 손해를 보면서 해약했던 건 그나마 잘한 일이다. 퇴직하고 점점 늙어갈 난 지금 가지고 있는 보험은 유지해야 한다.      

난 매달 빠져나가는 금액을 뺀 잔액을 확인했다. 훈풍에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이 심란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린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충분하다. 카페 나들이, 책 구매, 영화 보기, 자동차 기름 채우기, 친구 만나 맛있는 거 먹고 놀기 등. 넘치는 시간을 미치도록 하고 싶었던 것들로 채울 수 있다.      


난 부드러워진 마음을 쓰다듬다 문득 냉동실에 있는 '누가바'가 생각났다. 내가 맥주 마신 후 즐기는 '누가바, 비비빅, 바밤바'가 냉동실에 꽉 차 있다. 며칠 전 엄마가 보고 싶다며 온 딸아이가 가득 채워놓고 간 것이다. 난 새벽 2시 조금 넘은 시간에 냉동실 문을 열고 딸아이 사랑인 '누가바' 2개를 먹은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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