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소한.
27층으로 엘리베이터를 불렀다. 1층서 꼼짝하지 않은 엘리베이터가 미워 눈을 흘기며 내림 버튼을 다시 눌러본다. 여전히 움직임이 없다. 1층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고장일까? 고개를 갸웃하다 비상계단 쪽을 바라봤다. 27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도 내 무릎은 문제없으려나. 생각에 빠져있는데 엘리베이터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계단을 바라보던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이게 무슨 일이지? 1층 2층 3층. 층마다 멈췄다 다시 올라온다. 택배 오는 시간이구나. 하필이면 지금 집을 나서다니. 바쁜 일도 없으니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한다. 이제 10층이다. 지루해진 난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제자리 걷기를 한다. 앞뒤로 팔을 흔드는 모습이 가을날 들판에서 바람에 흔들거리는 허수아비 같아 난 피식 웃었다.
나는 아파트 앞 신호가 바뀐 횡단보도를 걸었다. 오른쪽으로 걷고 있는 나를 뛰어오던 젊은 남자가 툭 치며 간다. 순간 놀란 내가 소리를 지르는데도 그 남자는 그냥 앞만 보고 달려간다. 신호등에 남은 시간이 7초로 바뀐 걸 본 나도 뛴다. 무사히 횡단보도를 건너온 난 그 남자가 치고 간 왼쪽 어깨를 어루만지며 ‘바쁜가 보지’라며 혼잣말했다. 왼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오른쪽 어깨로 옮기며 꽃가루 날리는 도로를 걸어 커피숍으로 향했다.
며칠 전 친구가 나에게 날려준 따뜻한 커피 한잔 쿠폰을 사용할 곳이다. 주문하는 곳에 선 내가 핸드폰에 있는 쿠폰을 찾고 있는데 묵직한 손이 내 왼쪽을 치고 들어온다.
“아아 네 잔요.”
묵직한 손이 순서를 무시하고 주문하면서 계산대에 카드를 내민다. 난 그 손 주인을 쳐다봤다. 내 눈길을 느끼지 못했는지 계산을 마친 그녀는 일행이 있는 자리로 간다. 잠깐 당황한 난 핸드폰 속 쿠폰으로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고 도로가 보이는 창가자리에 앉았다. 창 너머 하늘은 뿌옇다. 그래서인지 날개 짓하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황사로 뿌연 하늘이 집을 나서면서부터 묘하게 꼬인 기분을 더 진하게 한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묵직한 손 일행들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난 따뜻한 커피와 책을 버무리는 시간을 가지려 했는데. 뜨거운 커피만 마시다 카페를 나왔다.
난 집으로 가려고 신호등 앞에 섰다. 신호등이 바뀌어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우회전 차량이 진입한다. 놀란 난 운전자를 째려봤다. 이럴 땐 사진을 찍던지 소리를 질러야 하는 건데. 그냥 눈만 흘기다 집으로 왔다.
횡단보도에서 나를 치고 가던 젊은 남자, 카페에서 순서를 무시한 묵직한 손, 녹색신호인데도 횡단보도에 진입한 차량 운전자가 ‘미안하다’라고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짚을 꼬듯 배배 꼬인 내 마음이 풀렸을 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난 그들을 통해 '뛰지 말고 천천히'를 가슴속에 새긴 것이다. 오늘 하루는 지극히 사소하게 꼬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