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종일 비가 내렸다. 지인과 점심 약속이 있던 난 빨간 우산과 함께 집을 나섰다. 낮인데도 비가 내려서인지 거리는 어두웠다. 다행히 내가 입고 있는 무릎, 엉덩이가 나온 형광 색깔 운동복 바지가 가로등 역할을 했다. 평일 낮에 음식점이라니. 이런 자유로운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니. 난 개구쟁이 어린아이처럼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약속 장소로 갔다. 주문 전문점이어서인지 가락국숫집은 주문 전화만 계속됐고 홀은 조용했다. 지인과 난 비와 어울리는 가락국수와 떡볶이 주문 후 참새떼처럼 쫑알쫑알 이야기를 나눴다. 2년째 市에서 분양받은 텃밭을 가꾸는 지인은 4월 비는 한심하다고 했다.
“농사라 긴 좀 거시기하지만 내가 작년부터 이것저것 키워보니 이맘때 내리는 비는 쓸데가 없어. 이파리 나기 시작한 어린 잎사귀들이 빗물에 쓰러져 불기도 해서 이 비가 싫당게”
“목마른 애들한테 물주는 비 아닌가?”
“물은 내가 잘 주고 있재. 이놈들이 내가 가면 반갑다고 인사도 해. 그래서 내가 아침저녁 꼭 들여다 봄시롱 살피니깐 비는 지금 안 내려도 되재”
지인은 2년 동안 당신이 키운 상추, 부추, 감자, 고구마가 S대 합격한 아들인 양 입술에 침을 묻혀가며 자랑했다. 지인의 앙상한 어깨가 음식점 천장까지 두둥실 닿을 무렵 나온 매운 떡볶이와 가락국수 덕에 어깨는 다치지 않았다. 우린 2차로 진한 커피까지 마시고 헤어졌다.
쓸데없다는 4월 비 내리는 거리 풍경이 아쉬워 난 집 근처 카페를 놓치지 않았다. 무릎 나온 형광 색깔 운동복 바지를 들이밀며 창가 자리를 잡았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빗물에 젖은 가방을 열어 탁자 위로 올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와 책이 배부른 날 환하게 맞이했다. 첫 페이지 첫 문장을 읽은 순간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이 내 입안에서 목구멍으로 순식간에 넘어가버렸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생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로 책의 세계가 열린다. 장례식장에 모인 조문객과 어린 시절 기억이 하얀 눈덩이처럼 뭉쳐지며 아버지의 삶이 하나둘 섬진강 흐르는 구례에 펼쳐진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아버지 고상욱 씨는 물정 모르는 민중의 편안함만 생각하는 촌뜨기 순수한 사람이다. 정치와는 상관없는 사회주의자인 그는 1948년 겨울부터 1952년 봄까지 빨치산이었다. 그 4년이 칡넝쿨처럼 1980년 연좌제 폐지 전까지 딸, 사촌들 가족 모두의 삶을 칭칭 옭아맸다.
‘고작 사 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옥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 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십 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다. 사회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묻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빨갱이 새끼들은 다 때려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렀고, 아직도 휴전 중인 데다 남북의 이데올로기가 다르니 의견의 합치를 보기는 진작에 글러 먹은 일, 게다가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질 만한 주제도 아니다.’
76페이지를 읽으면서 난 머리가 띵해졌다.과연 난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얼마나 책임을 지며 살았던가?
화자인 딸의 아버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동네일에 발 벗고 나섰고, 동네 사람들도 그걸 알아서 무슨 일만 생기면 아버지를 찾았다. 집안일이 겹친 날 어머니가 집안일이 먼저라고 아버지 앞을 가로막으면 아버지는
“오죽흐먼 나헌티 전화를 했겄어”라며 오죽하면 타령만 했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받는다.'
맞는 말인 것 같다. 퇴직 후 시간이 많다 보니 혼자 이런저런 것들이 생각나 혼자 질겅질겅 껌 씹는 시간이 늘었다. 씹다 단물 빠진 껌은 뱉어야 하듯이 내 머릿속을 맴도는 섭섭한 일들은 잊어야 한다.
장례 마지막 날 화자인 딸은 새벽 강 건너 지리산은 검푸른 어둠에 잠겨있는 시간 울음 같기도 노래 같기도 한 소리를 따라갔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네’
창밖엔 여전히 쓸데없다는 4월 비는 계속 내리는 중이었고, 글로 써진 ‘클레멘타민’ 노래가 내 가슴에 화살이 되어 꽂혔다.10년 전 4월 그날이 화살촉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팠다.
골드러시 때 금광을 찾으려 대륙을 횡단하여 캘리포니아 협곡에 정착한 사내와 딸의 이야기에서 나온 노래가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한쪽으로 기운 배가 바닷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우린 그저 텔레비전을 통해 바라만 봤다. 사내처럼 금광을 찾기 위해 떠난 길이 아닌 교육부 지침에 의한 수학여행길이었는데. 웃고 떠들며 곧 도착할 제주도에서의 3박 4일을 기다리기만 했는데. 가만히 있으라 해서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
거친 강물에 휩쓸려 간 딸을 애타게 찾았던 그 사내가 그 해 4월의 우리들 모습이었다. 아니 그 사내와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더 처절했을 거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다가 갑자기 봄날 아지랑이처럼 잔잔하고 부드럽게 비가 내린다. 아마 4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표현할 단어가 없는 아픔에 울고 있을 그들의 가족과 우리에게 이젠 울음을 멈추라고 하는 건 아닐까? 아님 4월 하늘로 떠난 그들이 지쳐서 눈물을 멈춘 걸까? 난 이미 식어버린 쓴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화자 아버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위로하기도 한다. 그 위로가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잘 먹혔다.
고상욱 씨를 서른여섯이던 내가 만났다면 내 아버지처럼 날 그냥 안아주셨을 거다. 그때 내가 아는 많은 사람은 나만 보면 ‘짠해서 어쩔 거나. 젊은 나이에 서방 보내고 어찌 살거나’라는 말만 했다. 친정아버진 눈이 퉁퉁 부은 내게 ‘밥이 최고다’라며 일단 밥을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셨다. 나에겐 그 방법이 먹혔다.
또 화자 아버진 어느 해 홍수가 나 세찬 물길에 이것저것 쓸려가는 것을 보고 우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상 더러븐 것을 깨끔허니 치우는 것이 황톳물이여. 황톳물이 휩쓸고 지나가야 새 질이 열린당게."
화자인 딸 아버지는 당신이 죽으면 ‘암 데나 뿌레삐리라’ 했다. 사는 동안 내내 가족과 아버지를 옥죄던 빨치산 무대인 백운산에 수목장 하기로 했다. 다행히 백운산 한재에서 빨치산 어르신들이 모여 추모제를 지낸 적도 있었다. 광양 백운산 자락에서 서울대 연습림 입구까지 도착했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허가받지 않은 수목장을 그것도 남의 산에 하려는 건 불법 이어서다. 화자인 딸은 아버지가 평소에 자주 다니던 곳곳에 조금씩 뿌리기로 한다. 작은 봉지에 나눠 담아 온 아버지의 유골을 아버지가 평생을 다녔을 길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뿌리며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화자의 아버지를 보내드린다.
아버지 고상욱 씨 유골을 한 줌 한 줌 집어 하늘로 날리는 딸 고아리 모습이 서른여섯 내 모습과 겹쳐 코를 훌쩍거렸다. 아니 가족을 먼 곳으로 떠나보낸 사람들이 창밖에서 눈물 콧물 흘리고 있다. 난 깊이와 넓이가 달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각자의 슬픔을 안고 사는 그들과 목 놓아 울려고 카페 문을 나섰다. 밀가루처럼 매끄럽지 않고 거친 모래 같은 뼛가루가 지금도 내 손안에 남아 손바닥이 까칠하다. 난 그들과 부둥켜안고 울다 꽉 쥔 주먹을 펴 오래전 온기가 사라져 차가워진 유골을 빗속으로 날렸다. 살아가면서 슬픔을 기쁨을 나누며 같이한다면 4월 쓸데없는 비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가 될지도. 내년 4월엔 달디 단 초콜릿 같은 비가 되어 내 곁으로 오길 바라며.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열심히 산 우리 모두에게 좋은 소식이 올 거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