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원 Jul 31. 2022

출근과 거짓된 삶

죽음과 일과 죽음

 복직 후 처음으로 스터디 카페에 왔다. 창밖에는 비가 내린다. 스터디 카페에 오래 앉아 있으면 에어컨 때문에 추워진다. 너무 덥고 또 너무 추운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오랜만에 들른 스터디 카페는 여전하다. 올해의 상반기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는데. 이곳은 내가 가장 이완될 수 있는 공간 중 하나이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가장 편안하게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공간이고, 이곳에서 존재할 때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 나는 편안하게 지난 일주일을 써 내려간다. 일주일에 한 번, 브런치에 자유롭게 나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이 소중하다. 스터디 카페의 사물함에는 노트북과 핸드크림, 텀블러, 그리고 얇은 담요 소재의 긴팔 집업이 있다. 나는 뜨끈하고 달콤한 믹스커피를 두 잔 째 타서 마시고 있다. 공사장의 아저씨들도 저마다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한 잔씩 들고 있다. 일하는 사람에게 믹스커피란 어떤 위로와 다독임을 주는 것 같다. 


 나는 여러 번의 체념과 결심과 다짐을 반복하며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있다. 복직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벌써 지겹고 고통스럽다. 아직까지는 주말에 출근을 하지 않고 쉬어도 된다는 점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여전히 평일의 나는 죽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온전히 살아 있는 시간은 주말인데 그 주말의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서 공포스럽다. 여전히 하루 3회씩 부스피론을 먹고 있다.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속이 메슥거리면 한 번씩 약 복용을 건너뛰기도 한다.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약 먹는 것을 잊어버린다. 가끔은 이 약을 먹든 안 먹든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이제는 그만 먹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종종 찾아오는 참을 수 없는 감정들에 나는 굴복하듯이 약을 삼킨다. 


 여러 번 다짐했다. 스스로 지레 피해자가 되지는 말자고. 출근하고 일을 하는 일상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내 휴식을 가장 먼저 챙기자고. 너무 비극적인 생각에 골몰하지는 말자고, 소소한 재미를 찾고 소소한 즐거움에 집중하자고. 무엇보다 삶에 대해서 큰 기대를 갖지 말자고. 그냥 하루씩만 살아가자고. 

 

 지금의 나는 누구보다도 내 편이 되어주어야 하고, 누구보다도 나를 믿고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견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절실히 나를 믿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삶이라는 게 참 부질없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것 아닌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들 하지만. 

 너무 이상했다. 아침이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사무실에 도착하면 마음에도 없는 말과, 마음에도 없는 표정을 하고. 하루 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고, 트러블을 겪고, 부대끼고,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고, 나 또한 상처를 받으며 하루를 보내다가, 누군가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사람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데, 그 시간에도 나는 미치도록 싫은 사무실에 출근을 해서 일을 하고 있다. 부고 소식을 듣고서도 조용히 앉은 채로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며 일을 해치우고 있는 내가 정상인가,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퇴근을 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그런 사실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게 전혀 어렵지 않아서 놀라웠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 나의 모든 것들이 거짓이다. 직장에서는. 


직장에서의 내가 얼마나 거짓되게 사는지 생각해 본다. 직장에서의 나는 거의 먹지 않는다. 과자나 라면도 입에 대지 않는다.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다. 직장에서의 나는 상냥하고 고분고분하다. 직장에서의 나는 몸에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직장에서의 나는 영혼 없이 웃고 영혼 없이 반응하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동료에게 다정하게 대하고 상사의 말에 웃음 짓는다.

  직장에 발을 들일 때와 집안에 발을 들일 때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집에 있을 때의 나는 밀가루를 좋아하고 과자와 군것질을 즐기고 라면을 즐겨 먹는다. 얼굴은 구겨져 있거나 활짝 펴지기도 하고,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큰 소리로 웃고 거침없이 욕도 한다. 내가 직장에 가 있을 때 내 영혼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 걸까. 내 육신을 떠나 있던 내 영혼은 그만큼 안전하게 보존되었던 걸까, 아니면 영혼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서 숨겨져 있다가 오히려 시들어 버리고 말았을까. 


 어제는 쉬는 날이었다. 사주를 보러 갔다. 몇몇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았는데 답은 명료했다. 조직생활이 맞지는 않는 사람이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편해질 것이다. 내년에는 더 편해지고 내후년은 더 좋아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좋아질 일들만 남았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왔다.

 나는 아직도 내가 현실 감각 없는 철부지인지, 아니면 타당한 이유로 고통받는 중인지 모르겠다. 벌써 일요일 오전이 다 갔다는 것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다. 평일이 되면 죽어버리는 내 영혼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까. 주말이 되면 평일을 두려워하며 불안에 떠는 영혼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까. 


 어떤 순간들에 나는 내가 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만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쓰는 것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가끔은 글을 쓴다는 것이 너무 버겁고 먼 길처럼, 또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헤매고 다닐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나는 나의 고통에 골몰해 있다. 

 죽음이 참 아픈데 삶도 아프다는 걸 생각하면 참 이상하다. 이제는 없는 당신의 삶은 어땠을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작가의 이전글 복직 2주 차의 날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