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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Aug 21. 2022

서른의 플레이리스트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는 것처럼

비극적 이야기는 파내면 파낼수록 얼마든지 솟아난다. 누구나 그렇다고,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생각해야 견딜만해질까. 그런 상황에서도 웃을 일들을 찾아내며 살아가는 이들로부터 비법을 배워야 할까. 


여름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나는 이제 겨우 서른인데, 내 인생에서 좋은 날들은 다 끝나버린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이 정상일까? 취업이라는 목표를 향해 돌고 돌아서 도착한 곳이 이곳이다. 애매하게 좋은 이곳은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숨 막히다가도 어쩔 수 없이 안주하게 되는 곳이다.


 아주 오랜만에, 옛날에 즐겨 듣던 짙은의 1집을 검색해서 들어보았다. 고등학생 때 우연히 짙은은 알게 된 후로 쭉 그 감성을 좋아했다. 대학생 때는 꽤 열심히 공연장을 찾아다녔다. 지방에는 인디 뮤지션들의 공연이 자주 열리지 않지만, 다행히 그는 내가 있는 지방에서도 자주 공연을 하는 편이었다.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귀를 가득 메우며 밀려드는 음악. 감성에 푹 잠겨 있을 수 있었던 그 저녁들이 참 좋았다. 


 최근에는 코로나의 탓도 있었고, 그것 때문에 일이 바빠진 이유도 있었고, 그 전에는 취준을 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음악이나 콘서트나 그런 감성 같은 것들은 전부 내 삶에서 저만치 밀쳐져 있었다. 최근에는 딱히 좋아하는 가수도 없었고, 누군가의 노래를 제대로 듣거나 따라 불러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유튜브를 표류하면서 누군가가 멋지게 차려 놓은 플레이리스트만 깔짝거렸다. 그마저도 진득하게 정착하지 못하고 쿡쿡 찔러보며 넘기기만 했던 것 같다. 

 인디 뮤지션의 작은 공연장에서 호흡하며 몰입하는 분위기가 문득 몹시 그리워졌다. 


 서른이 되고 점점 걱정이 많아졌다. 대대로 단명하는 유전자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잇따른 집안 어른들의 죽음과 예전 같지 않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한 걱정. 그래서 부모님이 나를 일찍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 늙은 개가 아픈 것에 대한 걱정. 체력이든 관절이든 시력이든 치아든 노화하는 얼굴이든 멀쩡치 못한 내 몸뚱이에 대한 걱정. 겨우 서른에 엄살이 심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게는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운 듯 그런 걱정들이 코앞에서 나를 압박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내 신체의 부서질 것 같은 약함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결코 아이를 낳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애초에 자식을 낳아 키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더더욱,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나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리라는 공포. 그렇다면 누가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할까? 자꾸만 의존하고 싶고, 의지하고 싶어지는 마음들. 나약한 몸에 깃든 나약한 정신. 


 내 앞에 놓인 삼십 대는 마치 자취방에 쌓여있는 처치 불가능한 반찬통들 같다. 엄마가 바리바리 싸서 보내준, 하지만 다 먹지 못하고 썩어 버릴 것이 뻔해 보이는 엄청난 양의 그것들. 


 내게 삼십 대가 이십 대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그때는 있었고 이제는 없어진 듯한 희망을 한번 더 가질 수 있을까. 취업 이후 침잠해 가기만 하는 내 삶에 새로운 계기나 전환점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래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복직 후에 너무 욕심을 내어 소설 합평 수업을 신청했던 것인지 이번 수업에서는 단편을 준비하기가 너무 빠듯했다. 초고를 빨리 완성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좀처럼 초고를 쓸 체력이나 시간의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아이디어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이전보다 나은 것을 쓰고 싶은 욕심, 허점이 많은 글을 썼다가 다 아는 내용의 욕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워지는 마음. 나는 시간을 들여 아무 쓸모없는 글을 쓰고, 또 돈과 시간을 들여서 그 글을 남들에게 보여주며 쓴소리를 듣는다. 종종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결국은 쓰는 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지 않다. 나는 자주 두려움을 느끼지만 글을 쓸 때 느끼는 두려움만은 긍정적인 감각이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결국은 즐거움으로 귀결되는 경로이다. 그것은 삶과는 달라서 마냥 비극적이거나 슬프기만 하지 않다. 일요일 오후, 나는 다시 소설 쓸 궁리를 한다. 마감 앞에 쫄려 가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30대도, 크게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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