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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Oct 09. 2022

회사에서 약 먹은 이야기

  10월이 오는 것이 두렵지 않았던 이유는 2주 연속으로 월요일마다 이어지는 공휴일 때문이었다. 지난주에는 연가를 써서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꽤 긴 휴식 기간이 있었지만 허무하도록 금방 그 시간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미루어 두었던 월요병이 밀려왔다. 그렇게 쉬었는데도 출근을 하려니 저조한 컨디션이 나아지지를 않았다.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아침이면 비관적인 기분이 되어 눈을 떴다. 왜 벌써 아침인가, 왜 출근을 해야 하는가... 당장이라도 회사를 그만둬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일은 왜 이렇게 밀려오고 황당한 업무는 왜 이렇게 많은지 모니터를 앞에 두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렸고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동료들이 무슨 일 있냐고 물었는데 그냥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장문의 카톡으로 힘듦을 토로하는 내 모습이 딱 에너지 뱀파이어와 다름없었다. 도리어 나 때문에 힘들다는 가족들을 보면서 자괴감이 밀려왔다.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서 항복하는 심정으로 필요시 약을 꺼내 먹었다. 화수목금, 일주일에 겨우 4일을  출근하는 동안 그중 이틀을 못 참고 약을 먹었다. 벤조디아제핀계 항불안제인데 의존성이 있기 때문에 자주 먹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지금껏 딱 한 번(복직 전 인사드리러 갈 때)인가 먹고 가방 속에 처박아둔 약이었다. 그걸 가방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니 다행이지. 바닷속에서 산소통을 찾아 급히 코를 박듯이 약을 목구멍 속으로 털어 넣었다. 즉각적인 효과가 있는 약이라고는 하지만 위약효과인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진정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 하루 3번씩 복용했던 항불안제는 의존성이 없고 안전한 편이라 의사는 당분간 계속 먹어보자고 권했지만 나에게는 부작용이 있었다. 약을 먹은 직후에 숙취처럼 밀려오는 두통과 메슥거림, 어지럼증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약을 먹은 지 두 달이 지나도 종종 그런 부작용이 일어났다. 최소 2~3주 이상은 복용해야 효과가 일어나는 약이기 때문인지 먹으면서 눈에 띄는 효과가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느샌가 얼굴이 너무 노랗게 변한 것 같다는 점이었다. 얼굴이 노래졌다는 것 자체도 스트레스였지만 간이 망가지고 있는 것일까 봐 두려웠다. 정확한 간수치는 혈액검사를 해보아야 알겠지만, 출근하느라 바쁜데 혈액검사를 하기 위해 병원을 찾아야 한다는 점도 너무 귀찮고 힘들게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결국은... 이제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명상도 하고.. 그렇게 잘 관리하면 약 없어도 괜찮겠지, 생각하며 약을 끊어버린 지 한 달이 지난 것이었다(물론 그렇게 생각만 해 놓고 운동이나 명상은 열심히 하지 않았다..).


  지난주에는 그렇게 필요시 약을 두 번 먹었고, 약을 먹을 때마다 어쩐지 극적인 효과가 생긴 듯해서 만족스러웠다. 출근해서 절망의 늪에 빠져 있다가 약을 먹고 나서야 오늘이 금요일이고, 이후 3일은 쉴 수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면서 기분이 지나치게 좋아졌다. 커피도 두어 잔 들이켰고 그래서인지 더 들뜬 것 같았다. 조증 상태가 된 것처럼 아무 일 없는데도 실실 웃으며 통화를 했고, 업무상 메시지를 보낼 때는 쓸데없이 하트를 붙여서 보내기까지 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업무들이 쏟아져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약을 먹고 어지럽거나 메슥거리거나 졸린다거나 하는 부작용도 없었다. 너무 괜찮은데? 앞으로도 일하다가 당장 때려치우고 싶어지고 인생이 다 망한 것처럼 느껴지고 그냥 콱 죽고 싶어질 땐 이 약 한 알만 먹으면 되는 거 아냐? 하는 희망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그날 밤에는 나 때문에 잔뜩 지쳐 골이 난 가족들에게 사과도 하고 먼저 나서서 설거지까지 했다. 평소에는 힘들다는 핑계로 온갖 불행한 일들을 들먹이며 트집을 잡고 자리에 드러눕기 바빴던 것을 생각해 보면 엄청난 에너지의 차이였다.

 

  그리고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잠들었다가 문득 깨고 나서 심장이 이상하게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위태롭게 진동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얇은 유리잔처럼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것처럼 심장이 비틀거리는 느낌.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진정해 보려고 심호흡을 했다. 자다가 깨어나서 비몽사몽간에 착각을 한 걸까. 몇 번 심호흡을 하니 이제 심장이 진정되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심장 부근으로 손을 갖다 대 보아도 심장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지? 또 덜컥 겁이 났다.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봐도 심장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그럼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손목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맥을 짚어 보니 정상적으로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약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부작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을 뒤척이다가 잠들었다. 역시 약은 무섭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다고 약을 먹지 않고 지내기엔 출근하는 일상을 견딜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행히 내일도 쉬는 날이지만, 연휴의 마지막 날은 어쩔 수 없이 울적해진다. 내일은... 오전에 동물병원에 다녀온 뒤에 오후에는 커피를 마시면서 아직 못 읽었던 책들을 마저 읽고, 슬슬 다음 단편을 쓸 준비를 하고 싶다. 좋아하는 펜으로 노트에 자유롭게 끄적이면서, 소설에 대한 생각들을 알처럼 오래 품었다가 올해가 끝나기 전에 2022년의 마지막 단편을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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