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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Dec 26. 2022

다시, 돌아갈 시간

살아가는 데 끝없이 용기가 필요하다

밤 열한 시가 되어 가는 시간이다. 내일 출근을 위해서는 자야 하지만 오늘은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셔서인지 아직 졸리지가 않다. 운동도 조금 했고 시집도 읽었다. 음악을 들었고 마트에 들러 바나나와 배수구 클리너와 튀김옷을 입혀둔 돈가스를 사 왔다. 무슨무슨 꿈을 꾸었는데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출근하는 길에는 눈물 나게 제설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얼음을 다 부숴 놓은 것이다. 빙판이 굴러다니는 중. 그 사람의 손목은 괜찮을지. 큰길에는 포클레인이 와서 눈을 퍼갔다고 한다. 퍼내고 나면 다시 쌓여 있는 눈.


책들을 잔뜩 빌려 두었고 또 몇 권은 사기도 했는데 정작 빌려온 책들은 반납기한이 오도록 다 읽지 못했고 사온 책들에만 손이 갔다. 


어쩌면 이번에는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또 겨우 2주일인가를 만난 끝에 완전히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질린 건지, 얼마나 정 떨어졌는지. 헤어지자는 합의에 있어서는 우리 꽤 마음이 잘 통하는구나. 이것만은 잘 맞는 편이구나. 사실 마지막 날에는 제발 헤어져 주라, 제발 그만 만나자,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지긋지긋했는지 모르겠다. 


상처와 분노가 있다. 너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구나. 말로만 다 해 먹었구나. 황당한 감정들. 우리는 사는 세계가 다른 것 같아. 내가 말했고 너는 그게 무슨 말인지 다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순간이 아니더라도 곰곰 되새겨봤을 때는 전부 이해했을 것이다. 어떤 말의 뉘앙스나 표정에 대해서 귀신처럼 잘 알아차리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마지막 표정을 기억한다. 착한 바보 같은 얼굴로 손을 흔들던 모습이다. 나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지 모르겠다. 아마 약간 쌀쌀맞았을지 모른다. 바람이 차가웠고 옷자락이 흩날렸으니까. 내가 웃는 게 약간 쓸쓸했을 것이고 나는 오래 너의 눈동자를 읽어보려고 애썼는데 그 눈도 그다지 행복한 눈은 아니더라. 쓸쓸한 갈색 눈이더라. 


나는 사진을 찍지 않았고 너도 그다지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던 걸 보면 사진을 찍는 행위의 쓸모없음을 알고 있었을까. 


우리는 모든 것들을 말로 하고 말속에서 끝냈다. 


쓸데없는 불안일 것을 알지만 괜히 불안했다. 불안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비극적인 상상의 끝은 비참했다. 기다리는 수밖에는 별 수 없다는 걸 안다. 앞으로 최소한 열흘은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혼자서 그런 불안을 떠맡아야 한다는 건 불공평해. 내가 왜 그런 혼자만의 아픔을 떠맡아야 하지? 쓸데없다. 쓸데없어. 


나 혼자 불행한 사람 같다고 느껴질 때 글을 쓰고 남의 불행을 읽는다. 시나 소설은 불행한 이야기가 가득하고 나는 남의 불행 속에서 안락함을 느낀다. 


오늘 앤솔러지 시집을 받았다. 웃기는 게 헤어지는 날마다 이런 게 날아왔다. 그러니까 문학이 차라리 나랑 살자고 말하는 것처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편집자분이 내 글을 다듬은 것은 아닌지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원본 그대로가 맞았다. 낯선데 부족함이 쑥스러우면서도 좋았다. 사랑받고 싶다. 더 읽히고 싶다.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하트 올라가는 속도가 더디다. 더, 더 많이 공감받고 싶다. 더 읽히는 글이 되고 싶다. 더 이해받고 싶다. 누가 내 존재에 관심 좀 가져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애정을 갈구한다. 내가 쓰는 글은 나를 토해내고 그것을 사랑해달라는 요구다.


그래서 내일은 어떻게 출근을 해야 할지 두려워졌다. 함께하는 사람들은 그대로이고 일은 그저 그런 것들의 연속인데 나는 너무 두려워졌다. 홀가분하기도 했고 자유의 몸이 된 것이 기뻤지만 해방감을 느꼈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익숙한 고통, 그것에 의지하는 생활, 그렇게 굴러가는 삶의 당연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새로운 일상, 새로운 관계 맺음에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는 새로운 노력과 새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하니까. 시간을 들여야 하니까. 새롭게 주어지는 시간들이 너무도 허전하고 공허해서. 


책도 많이 보고 글도 많이 쓰고 영화도 보고 운동도 하고 요리도 해야지 청소도 해야지...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방학을 맞은 학생처럼. 


좋은 것들로 이 시간을 채우거나 또는 채우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저 휴식할 시간, 멍하니 있을 시간, 가만히 있을 시간, 회복할 시간, 정돈할 시간, 추스를 시간...


살아가는 데 끝없이 용기가 필요하다



가끔은 행복하게만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쓰라린 질투와 부러움을 느낀다. 나의 인생에는 왜 이렇게 결핍된 것이 많을까, 결핍에만 집중하는 건 조금 초라한가. 그런데 결국 그것이 내게 더 나은 문학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 나는 나의 문학에 더없이 확고한 믿음이 있고, 그런 믿음은 오차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바로 내가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나는 나의 빛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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