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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Dec 17. 2022

친밀한 관계에 대한 두려움

불안 불안 그리고 불안

이번 주의 글은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번 주말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이 눈이 다 녹아서 물이 된다면, 가뭄이 조금이라도 해소된다면 좋겠다. 내가 사는 지역은 가뭄이 극심해서 매일 아침마다 잔여 저수율이 몇 퍼센트인지에 대한 안내 문자가 온다. 문자를 볼 때마다 저수율은 30퍼센트 대에서 20퍼센트 대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대로라면 내년 봄에는 제한급수를 실시해서 씻고 싶어도 씻지 못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한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극심한 가뭄과 전염병과 그로 인한 농작물과 먹거리 가격 상승과 함께 치솟는 물가... 지구에서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이러한 환경 위기에 대한 불안감으로 기후 우울증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고 들었다.


환경의 변화라는 건 참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불안하고 우울했던 서른 살의 끝 무렵 10월에 갑작스럽게 연애를 시작했다. 겨우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에 탄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헤어짐을 결정하고 겨우 열흘 동안 나는 슬펐지만 안정감을 느꼈다. 슬픔이 안정적이라니 신기하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나만의 슬픔 속에서 충분히 빠져 있을 수 있었다. 슬픔은 좀처럼 누군가에 의해 뒤흔들어지지 않고 오직 나만이 깊은 물처럼 잠겨 있을 수 있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내가 그렇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라는 안정적인 판단. 이별 노래를 많이 들었다. 옛날부터 내가 좋아했던 곡들은 죄다 이별 노래였다. 도대체가, 그 어린 시절부터 나는 왜 그렇게 절절한 이별 노래에 마음을 빼앗겨 왔을까. 그래서 오랜만에 잊고 있던 곡들을 많이 찾아들었다. 


헤어지기 전에, 나는 동생과 함께 타로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연애운을 보는데 11월, 12월, 1월, 다 잘 지내고 2월은 조금 실망할 일이 생기겠지만 3월에도 여전히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다 뭐람. 12월이 되자마자 이별을 하게 된 나는 타로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대체 왜? 왜 그랬던 걸까? 하는 생각을 자꾸만 했다. 타로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결과가 일어나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우습지만, 헤어진 후 쓴 글에서 나는 결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적었지만... 결국은 다시 한번만 더 믿어달라는 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니까 겨우 열흘의 헤어짐 끝에 재회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역시, 내 팔자 내가 꼬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과 불안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남는 미련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끝을 낼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책장을 덮어야 한다는 건... 

재회를 결정하고 일주일이 흘렀다. 이번 일주일이 부담이었는지 우리는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스트레스로 배가 아팠고 잠이 많아졌다. 날씨가 부쩍 추워져서 더 크게 아플까 봐 몸을 사렸다. 낮잠을 자도 밤에 잠이 잘 왔고 또 반대로 피곤한데 자꾸 자다가 깨어나서 다음 날 더 피곤해지기도 했다. 불안한 꿈을 꿨다. 꿈에는 연인이 나타났는데 매번 불안한 사건으로 이어지는 꿈이었다. 이제는 더 상처를 주고받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 그렇게 힘들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도 많아졌고 불안감도 커졌다. 나는 뭐가 그렇게 불안했더라...


내가 만나는 이 사람에 대한 확신 없음. 나는 이 관계에 전념하고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지만, 끝내 그 끝이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 아픔과 파국으로 끝나게 될까 봐 두려운 것.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어떤 관계의 되풀이에 대해 무시무시한 저주 같은 것으로 느껴 왔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무의식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부모와 같은 배우자를 선택하고, 그러한 관계 방식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결국은 내가 지독히도 절망했던 그러한 관계를 운명처럼 반복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가 그런 사람이어서 끌렸거나, 혹은 내가 그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가거나...


어제는 저녁식사를 하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아빠가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었다. 자극적인 흥밋거리 위주의 소식을 보도하며 그 사건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방송이었는데 나는 그런 것을 보면 항상 기분이 나빠지곤 했으므로 여러 번 그 방송을 보기 싫다고 얘기하곤 했다. 어제도 나는 나름대로 아빠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감정을 배제하고 차분히 말을 했다. 소화가 잘 안 될 것 같으니까 다른 방송을 보자고, 했더니 아빠는 즉각 신경질을 내며 TV를 꺼 버리고는 리모컨을 던져 버렸다. TV도 내 맘대로 못 보게 하네,라고 버럭 화를 내면서. 나는 그게 꽤 비참해져서 오래 그 장면을 곱씹었다.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나의 입장을 설명했지만 나의 욕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어째서 사는 내내, 어린 시절부터 남들의 눈치를 그렇게 많이 봤는지, 과도하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과도하게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혹시라도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지, 그토록 신경을 많이 기울이며 살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반복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장할 때 상대방이 기분 상하고 화를 내고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상대방의 갑작스러운 기분 변화를, 날씨를 예측하듯이 레이더를 세우고 주시하며 조심해야 한다면... 얼마나 비참할까. 

누군가와의 친밀한 관계가 그래서 너무도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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