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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Aug 10. 2023

나의 첫 시나리오 수업

지금은 밤 10시 37분이다. 평소라면 이만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오늘은 꼭 기록해야 하는 날이기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나는 오늘 시나리오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수업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버스 정류장에서 통화를 하는데, 애인이 오늘 내가 하이텐션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확실하게 깨달았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버스 안에서 창 밖을 보는데 세상이 달라 보였다. 세상이 한 톤 더 밝고 맑고 깨끗해 보였다. 세상의 어둠과 아픔과 불안은 잠시 존재조차도 잊을 만큼.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 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 경험, 내가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의 행복이 분명하게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이 경험으로 얼마간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는 걸 안다. 나는 2021년 6월에 인생 첫 소설 합평을 받던 날 똑같은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나는 오늘 시나리오 수업에서 어떤 사람이었지? 수업 시간의 내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이 누구나 나를 밝고 맑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만큼. 자신감 있고 확신이 있고 영리하고 잠재력을 지닌 사람. 하지만 그게 평소의 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절대로. 직장에서의 나는 더군다나. 회사에서의 나는 의욕 없고, 조용하고,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시키는 일만 겨우 하고,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하고, 걱정하고, 불안하고, 고심하고, 회피하고, 도망가는 사람이다. 직장에서의 나로서만 살았더라면 나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30년을 고작 그런 사람으로 살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 나가고... 나는 비로소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은 느낌이었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찾아간 6주짜리 시나리오 수업은 25명의 지원자 중 5명을 선정해서 꾸린 수업이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의 창작을 지지하고 지원하면서 자신의 창작을 해내는 힘을 얻게 될 것이라 했다. 함께 쓰는 공동체. 이것은 내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것이었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께서 심상치 않았다. 수업의 시작부터, 자기소개를 하는 방식부터 엄청난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말씀 하나하나에서 창작자로서 새겨들어야 하는 인생의 자세 같은 것들이 포도알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탐스러운 포도알들을 열심히 주워 모으는 학생이 됐다. 지금껏 나름대로 소설을 배운답시고 야간대학원을 한 학기, 합평 수업을 꽤 여러 차례 들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진짜, 진짜 스승으로부터 배운다는 느낌. 그래서 그만 너무 감정이 밀려온 나머지 이런 글을 쓴다.. 하하..


6주짜리 짧은 수업일뿐이지만 이 경험이 내 인생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이 경험을 통해 나의 글쓰기가 달라지고, 나의 소설이 달라질 것 같다는 느낌. 생각해 보면 나는 졸업 이후보다 대학생 때의 안전함 속에서 배우는 시기를 행복해했던 것처럼, 나는 아마도 소설가로서 등단 이후보다 지금처럼 안전한 곳에서 배우며 나의 습작을 나누어 합평할 수 있는 이 시기를 더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내가 등단하기 이전에 배우고 있는 이 시기가 나의 가장 행복한 시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지금 이 순간을 더 소중하게 느껴지도록 한다.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 이런 소중함을 느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모르겠다. 이런 감정을 이렇게 진심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도 흔치 않은 경험이라는 걸 알기에 더욱더 행복하고 충만한 마음이다. 


강사 선생님도, 함께 수업을 듣는 구성원들도, 평소에 직장에서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이들과 함께할 때의 자유분방함, 허용감, 숨 쉴 수 있는 느낌, 내가 물고기라면 드디어 물속에 들어온 느낌, 산소가 부족하던 공간에 맑고 시원한 산소가 가득해진 느낌, 내가 이곳에 존재할 수 있어서 정말로 행복하고 다행이다. 이런 경험들로,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나의 삶을 채워갈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이 느낌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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