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 걸기

모든 것들이 멈춰버렸을 때

by 지원

1. 얼마든지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과 만나야만 하는 일도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선뜻 시작하지 못했던 것은 거기에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내게 어떤 재능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까 봐, 그러면 어떤 의미도 다 없어지게 될 것 같아서였다.

2. 어느새 여름의 끝물인지, 밤에는 추워서 창을 닫고 자야 했고, 낮에는 그늘 아래의 공기가 서늘했다. 여전히 햇살은 뜨겁지만... 여름이 끝나가는 것은 뭔지 모를 아쉬움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와 함께 가을의 시작은 얼마나 설레는지. 가을의 차가운 공기와 따사로운 햇볕은 그 자체로 느긋하고, 산뜻하다.

3. 말 출근은 아무리 해도 적응되지 않았다. 일을 하느라 주말 하루가 사라져 버리고 또 그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4. 배부른 소리 한다, 남들은 일을 하고 싶어도 직장이 없다, 월급 받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거기에 딱히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주말 출근이든 야근이든 나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깔깔 웃으며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나도 남들 눈에는 별생각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5. 내가 듣고 싶은 한마디는, 정말 고생이 많다, 수고한다, 네 덕분이다, 그런 격려와 응원의 말들이었다. 사명감 같은 것이나 봉사정신 같은 것이 왜 요구되어야 하는지,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다 내가 싸가지 없는 놈이라서 그렇겠거니. 그러고 나면 한층 기분이 더러웠다.

6. 머릿속으로는 항상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지만 막상 시간이 나면 늘어져 있기 바빴다. 온갖 쓸모없는 것들에 빠져 있으면 시간이 너무도 잘 갔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별 거 없는 인터넷 카페 글들이나 블로그를 들여다보거나, 유튜브로 남의 일상을 구경했다. 그렇게 머리를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비로소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드러누우면 그때부터는 어둠의 시간이었다. 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나가버린 주말을 생각했다. 평일에는 다시 주말을 기다리며, 주말에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인생이란 곧 하고 싶지만 못했던 것들의 리스트가 되기 마련이었다.

7. 글을 많이 써야겠다,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 주로 이런 것들 뿐이었는데.

8. 때로는 어둠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는 표정이 되었다. 왜 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짙은 어둠에 잠긴 밤에는 우울과 불안 속에 침몰하기 딱 좋았다. 아침의 나는 그런 것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침의 마음은 어떤 장막이 걷힌 것처럼 밝아지거나, 아니면 오히려 밤의 맨 정신 위에 몽롱하게 취하는 빛을 쏘아서 모든 게 한결 가벼워 보이고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밤은 한동안 나를 짓누르는 시간이었다.

9. 경험상 결국 이루어 냈던 일들은 당연히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의심이 확신보다 더 컸다. 확신을 얻고 싶어서 매달리는 것은 유튜브 타로 같은 것들이었다. 그마저도 대단한 확신을 심어주지는 못했고, 확신을 줄만한 타로점을 찾아 헤맸다. 물론 경험상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았지만.

10. 휴학을 했다. 야간 근무가 많아져서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사유였다. 언젠가 복학을 할 수 있을까, 졸업은 할 수 있을까? 이대로 살아도 별 문제는 없겠지만,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렇게 간절할 일인지, 모든 것들에 확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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