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RS 2013 :
빨간 허슬러, 카레카레의 흑사장, 그리고 홍콩 센트럴
Written by Funking
March 10, 2026
그의 첫 탈것은 나 같은 차가 아니었다.
노란색 오프로드 바이크였다.
중학교 때는 모페드를 몰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2종 원동기 면허를 땄고
그는 그 오토바이를 샀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빨간색 허슬러로 갈아탔다.
그때 그는 아직 몰랐다.
언젠가
사륜구동 SUV를 타고
산과 강과 바다를 다니게 될 거라는 것을.
1988년 12월. 크리스마스 시즌
대학 1학년 겨울이었다.
산타 인형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사진이
군대 가기 전 마지막 겨울 사진이 될 줄은.
이 사진을 찍은 다음날 그는 도쿄역에서 신칸센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왔다.
“クリスマスイブ…”
타츠로 야마시타의 Christmas Eve였다.
지금도 그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WHAM의 Last Christmas보다
타츠로를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신칸센과
군대 가기 전 마지막 겨울을.
1991년 6월
전역 후
그는 화대종주를 했다.
화엄사에서 시작해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었다.
노고단을 지나고
세석을 지나고
천왕봉까지 걸었다.
그때 그는 아직
자동차를 몰지 않았다.
대신
두 다리로 세상을 건너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1992년 1월 1일
그는
기약 없는 남태평양으로 떠났다.
첫 도착지는 피지였다.
나디 공항의 문이 열리는 순간
뜨거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처음에는 공항이 너무 더워
에어컨도 켜지 않는 줄 알았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다가
곧바로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밖이 더 더웠기 때문이다.
마치 사우나 문을 연 것처럼
습기와 열기가 동시에 밀려왔다.
그 순간
안경에 김이 서렸다.
그는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한다.
피지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풀사이드에서 보냈다.
수영을 하고
맥주를 마시고
낮잠을 자고
다시 수영을 했다.
맥주병은 이상하게 생겼다.
짧고 통통해서
마치 농약병 같았다.
그래도 더운 날씨 속에서는
그 어떤 맥주보다 시원했다.
일주일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그는
뉴질랜드로 건너갔다.
오클랜드였다.
그곳의 거리 이름들은
어딘가 영국 같았다.
퀸 스트리트
빅토리아 스트리트
퀸스랜드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마오리 이름의 도로도 있었다.
그는 그것이 좋았다.
그 나라는
자신들의 오래된 이름을
지우지 않고 남겨두고 있었다.
그는 버스를 타고 여행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때로는 낯선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은
영국 해군 출신이라는 선생님을 만났다.
영국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뉴질랜드에서 해군장교로 복무하다
마오리 여성을 만나 결혼했고
지금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그 집 식탁에 몇 번이나 앉았다.
낯선 나라에서
낯선 가족과 저녁을 먹는 경험은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그곳에서
싱가포르에서 온 여자를 만났다.
여행은
가끔
연애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어느 날
검은 모래 해변에 섰다.
카레카레 비치였다.
당시 그는
그곳이 영화 「폭풍 속으로」의 마지막 해변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파도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곳은
패트릭 스웨이지의 바다가 아니라
영화 「피아노」의 해변이었다는 것을.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순간
그는 자유였다.
군대도 없었고
직장도 없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저
바람과
검은 모래와
남태평양의 파도만 있었다.
오클랜드에서 그는
꽤 오래 머물렀다.
거의 5주였다.
뉴질랜드에서 보낸 8주 중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오클랜드에서 보냈다.
당시 많지 않았던 교민들
어떤 한국 교민들은
그에게 말했다.
“여기 이민 와요.
오면 우리가 자리 잡게 도와줄게요.”
그는 웃었다.
아마 그때
그 말을 받아들였다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돌아왔다.
그리고 아주 오래 뒤
나를 만났다.
나는
2013년형 레인지로버 스포츠.
그가 검은 모래 해변에서
두 팔을 벌리던 그 겨울에는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차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가 가끔
운전하며 멀리 떠나고 싶어하는 이유를.
그의 마음 어딘가에는
아직도
카레카레의 바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담)
코로나가 끝나자 마자 그는 해외로 나갔다.
홍콩 센트럴의 거리였다.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길을 건너다
문득 한 여자를 보았다.
걸음이 멈췄다.
뉴질랜드에서 만났던
그 싱가포르 여자를 닮아 있었다.
1992년의 여름이
갑자기 눈앞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 여자를 따라 걸었다.
센트럴의 사람들 사이로
그 여자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몇 번이나
“혹시…”
하고 불러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여자를 놓쳤다.
잠시 뒤
그는 혼자 웃었다.
그 여자가 정말 그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닮은 사람이었는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확실히 느꼈다.
시간이라는 것은
가끔 이렇게
예고 없이
옛 기억을 데리고 돌아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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