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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님 Jun 23. 2024

야, 너 아직도 그러고 사냐

지난 것은 지나간 대로 다 의미가 있는 법

오늘도 수원 남문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여기를 지날 때면 ‘그래,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웃는다. 이제는 내 안에서 삭을 대로 삭은 일들을 내보내고 허허롭게 웃을 때가 된 것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직을 사직하고 실의의 한복판을 지나던 때였다. 마음도 아픈데 사기꾼까지 만났다.      




영등포역 앞 버스정류장이다.

젊은이가 다가왔다. 집에 갈 차비가 없단다. 차비를 빌려주면 갚겠단다. 말없이 비켜섰다. 다시 길을 막아서며 애원하듯 말했다. 남의 사정 헤아릴 여유도 없었다. 시시비비를 가려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그냥 주었다. 모날 모시에 돌려주겠다며 도로 건너편 다방에서 보자고 했다.  그냥 어디든 가고, 무엇에게든 정신을 쏟아야 살 것 같았다. 그렇다고 누굴 만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일단 집 밖으로 나왔으나 갈 곳이 없었다. 그 다방에 갔다.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지 생각하다 속울음이 터졌다. 이게 어디 울 일인가? 이걸 빌미로 그동안 눌려 있던 서러움이 터지고 만 것이다. 남의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에 혼자 있을 때는 울려고 해도 울어지지 않던 울음이었다.      




학교의 학급이 줄어 교사 정원이 과원이라 했다. 가장 늦게 임용된 순서대로 사직을 하라는 학교의 요구였다. 아무 대책도 없었다. 이 학교 임용에 내가 가장 늦었다. 늦은 임용순서대로 세 명이 사직서를 썼다. 사직서를 내고 교무실에 오니 난롯가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동료들의 분위기는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의 편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과 함께 사직의 실감이 왔다. 그 사직이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모르는 현실감이 없는 신출내기였다. 셋이서 교육부 담당자를 찾아갔다. 힘들게, 반기지 않는 면담이 이루어졌다. 책임 있는 말은 없었다.   

얼마 후, 어느 선생님이 임용이 나보다 앞선 두 교사는 학교에 복직을 시켰다는 말을 했다. 이 소식은 사직을 할 때보다도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학교에서 두 교사를 복직시키며, 혼자 남는 나에게 어떤 설명조차 없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떤 이는 그랬다. 그 이야기를 꼭 나에게 전해주어야 했냐고... 그것은 아직도 자신 있게 판단을 못하고 있다. 나에게 알려주는 게 좋았을까, 묻어 두는 게 좋았을까. 어쨌든, 무기력했던 마음을 다시 다잡게 되었다.      




그렇게 사직을 하고, 공부를 해볼까 하여 영등포에 있는 학원을 알아보고 나오는 길에 사기꾼에게 낙첨된 것이었다. 어찌하든 울음을 토해내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오히려 울게 해 준 사기꾼한테 감사한 생각도 들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무엇이든 부딪혀 보자 했다. 성년이 된 20대 후반 나이에 집으로 갈 수도, 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공간에서 마냥 천정 보고 있을 형편도 아니었다. 다른 학교 채용공고에 응시했다. 남자가 필요하단다. 남자이상으로 열심히 하겠다 했으나 연락은 없었다. 정신지체아 가정교사를 하다가 장애인 사회복지시설 생활지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1년 후 사립특수학교를 설립할 계획이니 미리 와서 근무하라는 것이었다. 그 해 12월이 다가오고, 학교들마다 교사채용 공고가 나고 있었다. 학교를 개교한다는 소식이 없으니 불안했다. 개교가 안된다면 다른 학교를 알아보겠다고 하니, 더 기다려보라고 했다. 어느 날, 현관에서 지체부자유 원생의 걷는 훈련을 하고 있는데 체격이 큰 남자가 빛을 가리며 들어섰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로 몸이 굳었다. 과원 퇴직에 대한 탄원을 하러 가서 만났던 교육부 담당자였다. 학교설립에 대한 현장 실사를 나온 것이다.



    

개교로 학교 가까이에 방을 얻었다. 수원에 나왔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남문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시커먼 남자가 다가왔다.

"집에 갈 차비가 없어서...  빌려주시면 갚겠습니다."  

언젠가 들었던 느낌의 말투, 내용이었다.

그래, 영등포 역, 그 자식이다!

"야, 너 아직도 그러고 사냐."

허, 이런!

나도 모르게 내뱉아 놓고 순간, 무슨 행패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했다. 앞으로 무조건 뛰어 북수동 성당 앞까지 왔다.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쫓아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숨을 몰아 쉬었다.  내가 왜 도망쳐야 하는가? 이 나약함이라니.

영등포 역 앞에서 거짓이라는 걸 예감하면서도, 정말 사실대로 차비가 없었고, 그 돈이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나 보다. 그런데, 저 자는 아직도 지역을 바꿔가며 감성에 호소하는 사기행각을 하고 있다. 2년이라는 세월 동안 여전히 사회의 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견디며, 잘 살아온 나를 응원했다. 그리고 이 사기꾼이 바른 삶을 살기를 염원했다.     




생각만 해도 속절없이 눈물이 났었다. 어쩌다 지인과 사직 시절 이야기를 하게 되면 미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살아가는 한 과정이었다고... 세상엔 그보다 더 한 일도 있을 수 있다고’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낸 내가 대견하다고 토닥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눈물이 앞섰다. 그 일을 겪으며, 복잡다단했던 사유들이 마음 저 깊은 곳에 나도 모르는 눈물샘 하나 놓은 것 같았다. 아마도, 그 눈물은 감정보다 무의식에 작동하는 아무 성분 없는 단순한 물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몇 년이 지난 일에 그리 흐를까.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한다. 그래도 가슴이 요동은 친다. 상처의 흔적이 없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초연해질 뿐. 생애에 안 겪으면 좋았을 일이지만, 닥친 일이라면 견뎌 주는 게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단단하게 여물어간다. 가수 이적의 '걱정 말아요 그대'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 한 구절에 진하게 공감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는. 나쁜 일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나쁜 일 중에 배우게 되는 것, 얻게 되는 것이 있다. 힘들었던 경험이 살아가는 방향을 잡아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 경우의 대처 능력도, 공감력도 넓어지게 한다. 지난 것은 지나간 대로 그렇게 다 의미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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