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정님 Aug 28. 2024

스페인에서 코로나 19로 발이 묶였다.

산티아고 순례 후  코로나 19 체류기

이제는 좀 잠잠해지는가 했더니 요즘 다시 코로나19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 한다. 코로나19 이야기만 나오면 예상치 못한 고생을 했던 스페인에서의 체류가 떠오른다.      

2022년 7월, 14박 15일 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일행은 여행자 9명과 인솔자 1명, 모두 10명이었다. 스페인 레온에서 산티아고 드 콤파스텔라(대성당)까지 300km를 걷는 코스다. 스페인 입국 때 코로나19 백신접종 3차까지 한 증명서를 제출했다. 스페인에서는 마스크 착용이나 격리 등의 제재가 없었다. 우리가 알아서 조심할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순례를 마치고 귀국을 위해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수속을 하는데, 코로나19 검사 음성자만 항공기 탑승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입국하여 인천공항에서 검사받는 것으로 알았다. 코로나 19 증세를 나타내는 사람도 없었다. 출국수속 할 정도의 여유만 갖고 공항에 도착한 터라 시간이 촉박했다. 부랴부랴 공항 내 검사하는 곳을 찾아 검사했다. 검사 결과를 메일과 핸드폰 번호로 보냈다는데, 아하, 메일 비밀번호 오류라고 뜬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비번이 아리송한 것이다. 겨우 맞추어 봤으나 휴면상태다. 평소처럼 차근차근히 하면 될 일을 마음이 조급하니 보이는 게 없다. 당황한 마음은 생각을 마비시켰다. 탑승시간은 임박하고 모두들 본인 앞가림하느라 바쁜데, 내 것 찾아 달라하기도 민망하다. 핸드폰을 계속 뒤지다, 어떤 경로로 찾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검사결과를 찾았다. positive(양성)였다. 뜻밖에 나를 포함한 60대 여성 네 명이 모두 양성이었다. 걷는 동안 계속 같이 움직이며 숙식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느닷없이 마드리드 공항에 네 명이 남겨졌다. 이게 ‘국제미아'라는 건가. 인솔자는 정상적으로 탑승하여 가고, 어떻게 할 대책도 없었다. 한동안 모두 얼이 나간 듯 말이 없었다. 일단 공항 한적한 곳으로 가서 앉았다. 인터넷에서 한국대사관 전화번호를 찾아 연락을 했다. 전화를 받은 한국인 대사관 직원도 별 대책이 없었다. 얼마 후에 떠났던 인솔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점심식사를 했던 한국식당에 연락을 해서 도움을 요청하란다. 한국식당 주인의 소개로 우리를 받아줄 교포와 통화가 되었다. 주소를 알려주며 택시를 타고 오라 했다. 공항 출발 전, 약국에서 코로나 19 자가진단키트와 타이레놀 약을 샀다. 택시 타는 곳을 찾는 것도 헤맸다. 택시기사와 짧은 영어로, 스페인어 번역기로 대화하며 마드리드 로사스에 있는 교포 집에 도착했다. 집 앞에 우리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반지하 1층을 쓰라 했다. 사무실로 쓰던 곳이라는데, 창고 같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있는 짐들을 정리해서 방 2개를 마련했으나 더위가 문제였다. 숙박료는 1일 100유로. 교포 집이어서 말이 통하니 일단 마음이 놓였다. 주방은 같이 쓰되 주인과 겹치지 않는 시간에 쓰기로 했다. 우리는 당장 먹을 게 없어 마트로 같이 가달라고 했다. 이럴수록 건강은 더 챙겨야 하니까. 주변 마트 중 가장 크다는 Dia 마트에서 급한 식료품부터 샀지만 불안감은 좀체 사그라들지 않았고, 설상가상 피로감까지 엄습해 왔다.       

저녁식사를 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이가 없다. 단체로 움직이면서 코로나19 대처에 그리 무심하다니,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현재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확보된 정보를 총망라해 견딜 궁리를 해야 했다. 무엇보다 심신의 안정이 우선이었다. 그때 인솔자가 주었던 된장차 생각이 났다. 한 봉지를 타서 넷이 한 모금씩 마셨다. 짠맛은 없고 개운하고 구수한 된장 향이 났다. 용량 6g에 긴 스틱 포장이어서 편리했다. 이국에서 마시는 된장차에 집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예상치 못한 일에 생활비가 문제였다. 카드로 현금 인출을 하기 위하여 인터넷 정보를 찾았다. 어느 여행자 블로그에 스페인에서 수수료가 싸다는 iberCaja 현금인출 정보가 올려져 있었다. 구글맵으로 그 ATM기를 찾아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인터넷 정보 순서대로 인출과정을 사진 찍어가며 진행했다. 행여 잘못될까 봐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해댔다.

와우, 현금인출 성공!!! 세상 신기하고 뿌듯했다. 수수료도 한국에서 인출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런 유용한 정보를 올려준 사람이 있다니, 꼭 나를 위한 포스팅 같아 옆에 있다면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먹거리를 사러 다시 마트에 갔다. 가게의 과일들이 강력하게 유혹한다. 수박이 kg당 0.79유로, 우리의 절반가격이다. 산티아고 순례 때, 그늘 없는 땡볕의 황톳길을 걷다가 도네이션(제공되는 것을 취하고 기부하는 곳)을 만났을 때,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늘막에 앉아 세모로 잘라놓은 수박 한 조각을 베어 물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차마 접시를 다 비우지 못하고 한 조각 남긴 채, 다른 과일을 먹고 있으니 주인이 수박을 다시 채워 놓았다. 또 몇 조각을 먹었다. 먹고 싶은 만큼 먹은 아니었지만 참고 오렌지를 직접 짜서 마셨다. 아무리 기부금을 낸다지만, 이 사막 같은 곳에 수박이 한없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다음 사람도 먹어야 할 것이다. 양껏 못 먹은 수박이 저렴한 가격으로 눈앞에 있으니 참 속절없이 행복하다. 식료품과 생활용품들을 넣은 봉지를 들고 집을 향해 걸었다. 한적한 거리의 먼 끝에 묽은 안개가 퍼지듯 부옇게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로사스에서 마음을 안정시키기에 좋았으나, 지내기가 불편하여 마드리드 아파트로 옮겼다. 1층의 층고를 높여 아래층은 화장실과 주방, 거실이 있고, 위층은 침실 두 개가 있었다. 위층을 난간도 없는 1인 통행용 빨간 철계단으로 오르면 천정이 낮아 키 큰 사람은 허리를 제대로 못 폈다. 더운 날씨에 침대는 좁고, 열을 식힐 수 있는 것은 작은 선풍기 하나였다. 숙소 가까이에 있는 알무데나 대성당과 마드리드 왕궁을 돌아보고, 기온이 좀 내려간 저녁 무렵이면 사바티니 공원에 나가 바람으로 열을 식히곤 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속담이 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주변을 더 여행하고 즐기면 좋으련만, 피곤해지면 행여 코로나 19 증세가 더 오래갈까 봐 조바심이 났다. ‘삼시 세 끼’ 예능프로그램처럼 세끼 밥만 해 먹어도 시간이 빨리 갔다. 한식 식자재가 없으니 자연스레 흰쌀죽과 바게트, 요구르트, 과일, 야채샐러드, 소고기 등이 주식이 되었다. 이곳의 과일들은 싱싱하고 가격도 저렴하고 맛있었다. 특히 천도복숭아와 납작 복숭아는 정말 맛있었다. 납작하게 생긴 복숭아는 생긴 모양대로 우리가 ‘납작 복숭아’라고 이름 붙였는데, 인터넷에 보니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Alcampo 마트에서 계산하려고 줄을 섰는데 계산 요원이 자꾸 밀어내는 시늉을 했다. 알고 보니, 계산대마다 각각 줄을 서는 것이 아니고, 한 줄로 서 있다가 차례가 되면 빈 계산대로 가는 방식이었다. 줄이 길어서, 계산하려는 줄인 지 상품을 고르는 중인지 구별이 안 갔다. 매너 없는 사람들이 되어 상품을 찾아 담는 시간보다 계산하는 시간이 더 걸렸다. 약품을 사기 위해 구글맵으로 약국을 찾았지만 문을 닫았다. 사람들에게 우리의 짧은 영어실력으로 물었으나 소통불가. 어느 중년 남자에게 물었더니, ‘팔로우 미’ 한다. 귀가 번쩍했다. 약국까지 안내해 주고 가는 그에게 다 같이 땡큐, 땡큐!     




자가진단키트로 검사를 해 보았다. 나는 음성, 셋은 양성이 나왔다. 키트에 나타난 빨간 두 줄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모두들 코로나 증세가 없을 정도로 건강 상태가 양호하여 다행이었다. 식염수를 코로 들이켜 입으로 토해내는 코 씻어내기를 했다. 처음해 보는 코 세척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코가 찡하고, 눈물 나고 머리마저 띵하다. 어떻게든 빨리 코로나 19 음성 확인을 받고자 하는 생존 몸부림이었다.      

정식으로 코로나검사를 받으러 안티젠 한국승인 검사소라는 macrogen clinical center로 택시를 타고 갔다. 교포가 알아봐 준 곳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곳이라고 한다. 검사소에 들어가기 전에, 알코올로 콧속을 깊숙이 닦아 소독을 했다. 한국인이라 했더니, 한국인 직원을 불러주어 원활하게 진행됐다. PCR 검사비용은 20유로, 한화 약 2만 5천 원이다. 바로 검사결과가 나왔다. 이 검사도 나는 음성, 셋은 양성이다. 검사소 옆 건물에 ‘kimchi’라는 카페가 있었다. 이름만으로도 반가워 얼른 들어갔지만 김치와 연관되는 것은 없었다. 연유를 물으니 전에 하던 사람이 지은 거란다.




체류 8일째 되는 날, 다시 PCR 검사를 받은 결과, 이번에는 네 명 모두 음성이었다. 코로나검사의 유효기간은 출발일 기준 24시간 이전이다. 어렵게 음성판정은 받았으나, 24시간 전에 출국하는 항공권을 구하지 못해, 다음 날 다시 검사를 받았다. macrogen에서 PCR 검사를 무려 네 번을 받은 끝에 음성결과와 항공권 구매까지 마칠 수 있었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마드리드 하늘에 환호성을 날렸다.

5박 6일 머물렀던 아파트를 떠나 마드리드 공항과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숙소를 옮겼다. 교포가 마사지 숍과 함께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다. 다음날, 마드리드 공항까지 승합차로 데려다주었다. 공항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체크인 카운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 지나가던 한국인 청년에게 물어 긴 줄의 꼬리에 이어 섰다. 한국인 청년이 우리를 한 번 더 돌아보고 갔다. 아마 우리가 잘하고 있는지 염려가 됐던 모양이다. 남의 일을 걱정해 주는 한국인의 진한 동족애였다. 시간이 지나도 줄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줄을 맞게 서 있는 것인지, 이 속도로 수속하여 제시간에 탑승할 수 있을지 불안해졌다. 뒷사람에게 티켓을 보여 주니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알고 답하는 것인지, 답답함만 더했다. 분주한 체크인 카운터 옆의 카운터에 사람이 비었다. 무조건 가서 티켓을 들이밀어 봤다. 손을 자기 앞쪽으로 까딱거리며 오라는 손짓을 한다, 여권과 PCR 검사 확인서를 주니 수화물을 받고, 항공권 2장을 주었다. 뮌헨을 경유하여 인천으로 가는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편이었다. 검색대를 통과하여 출국장 탑승구로 왔다. 사람들이 서 있는 줄 중에서 가장 짧은 줄에 섰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이 줄만 이렇게 짧을 리가… 항공권을 다시 살피니 그룹 3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면 그렇지, 그룹 3 줄 꼬리로 한참을 걸어가 섰다. 아뿔싸! 가장 길었던 줄은 그 사이 더 길어져 있었다.

뮌헨공항에 왔다. 인천행 환승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공항 내를 돌며 이것저것 구경하는데 ‘뮌헨’이라고 씌어 있는 귀여운 아기 반팔 티가 눈에 쏙 들어왔다. 손녀 선물로 분홍색을 샀다. 레스토랑 겸 바인 Selmans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오렌지주스와 간단한 스낵류를 주문했다. 즉석에서 짜주는 오렌지주스는 그새 우리의 필수 음료가 되어 있었다. 탑승시간을 기다리며 오래 자리 잡고 있으려니 매장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유로동전을 털어 한 번 더 간식을 사 먹었다. 귀국이 현실화되니 자연스레 웃음이 나오고 유쾌해졌다. 드디어 루프트한자 비행기 트랩을 오르는데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드리드의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준 교포 분들이 떠올라 감사의 마음을 새겼다. 기내 창 아래로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흰 구름이 뭉게뭉게 솜사탕처럼 피어났다. 뭉게구름 위를 나는 비행기의 날렵한 날개 끝에, 루프트한자 항공의 로고, 학이 멋져 보였다.      



세상에 이보다 더 힘든 한국 입국은 앞으로 영원히 없을 것 같았다. 남편에게 인천공항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반갑게 받아주는 남편의 목소리에 누군가 한 말이 실감 났다. ‘여행은 돌아갈 곳이 있어 즐겁다’는 그 말. 통화가 끝나자마자 징~ 문자가 들어온다. 놀랍게도 내 거주 지역의 보건소에서 코로나 PCR 검사를 받으라는 내용이다. 그나마 자가 격리는 없으니 감사했다. 코로나 비상시국에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보건소 검사 결과, 음성이어서 다행이었다.      

사실, 마드리드 공항에서 첫 입국하려 할 때만 양성이었고, 이후 계속 음성이어서 한편으론 의아하기도 했다. 네 명이 끝까지 뭉쳐 있으라고, 처음 한 번 오진을 내 준 걸까, 아님 이미 오래전 앓고 치료된 마지막 후유증이었을까?

일행 중 어느 집 딸의 조언이었다. ‘확진 8일 이후면 음성 확인서 없이 입국할 수 있다. 어차피 그만큼의 시일은 걸릴 것이니 음성 확인받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여행을 더 하시라’고 했다. 일리 있는 말이라 하면서도 끝까지 발버둥을 치다 결국 체류 10일을 채우고 입국하게 되었다. 놓을 것은 얼른 놓으며 여유를 갖는 지혜가 필요했다. 젊은이의 상황판단에 대한 현명함과 슬기가 두고 온 산티아고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납작 복숭아가 생각나서, *팡에서 주문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그 맛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을 한다지만 기후 풍토가 다르니 같은 맛을 내기 어려우리라. 품종 개량의 발전으로 머잖아 맛있는 국산 납작 복숭아가 나오길 바래본다.

산티아고 이후 메일이 휴면이 되지 않도록 관리한다. 오가는 메일이 없을 때는 스팸메일이라도 정리한다. 어떤 매체든 관리하고 유용하게 쓸 줄 알아야 고생을 덜 한다는 것을 체득했으니까.

산티아고의 아름다운 풍경과 잊지 못할 이 이야기들을 남기고 싶었다. 퍼*** 사이트에서 사진과 글을 편집하여 포토북을 만들었다. 가끔 이 특별했던 경험과 추억을 시각과 기억으로 꺼내보며 미소를 짓는다.



작가의 이전글 남해안 남파랑길을 걸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