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장르극, 코로나19'를 마치며
상상의 공동체는 국가만이 아니다.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상상의 독자를 가지고 있다. 일기를 쓸 때조차 마음의 독자를 갖는다. 상상의 독자가 누구냐에 따라 우리가 쓰는 글이 달라진다. 이 상상의 독자는 우리 자신의 복제품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는 범죄 집단처럼 공범관계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실의 독자들은 다양하며 그 욕구와 관심도 다르다. 지나가는 누군가를 붙잡고 코로나를 핑계로 이야기를 하겠다며 느닷없이 열대거세미나방이나 리슈만편모충 이야기를 건넨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싶다. 내가 올린 글들이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에필로그를 쓰기 위해 올린 글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뭐랄까, 밤에 쓴 글을 아침에 다시 읽는 심정이다. 어떤 느낌일지 아실 거다. 실수다, 저 문장 다시 쓰고 싶다, 저 단락 빼고 싶다, 이 글을 시작한 것 자체가 후회된다 등등. 그 재독을 통해 상상의 독자들이 교체되고, 현실의 얼굴을 한 독자들이 나타난다. 이 글은 도대체 뭐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반응을 멈추게 하는 글. 댓글을 달 수 없게 하는 글. 나쁜 글. 어려운 글. 내가 다 읽지 않은 글 혹은 다 읽고 싶지 않은 글. 구독을 누르기 주저되는 글. 상상의 독자들에 대한 배신감이 생겼지만 이미 늦었다. 깨달음은 종종 늦게 온다.
수정은 위험한 욕구다. 교정 차원에서, 틀린 조사, 잘못된 구두점, 누가 봐도 비문인 문장, 이런 경우만 글을 올리고 난 뒤 고쳤고 글을 못 쓴 실수는 괴롭지만 남기기로 했다. 설사 내용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실수를 남기기로 했다.
제목에서 성공을 예감했다. 장르극이란 장르적 문법에 충실하다는 뜻이다. 가령, 감염병이 돌 때 처음 과장된 수치가 날아다니고, 두려움의 말들이 SNS에 오가는 등 전형적인 반응들이 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도 그런 일반적인 코스를 따라가는 사건이라는 뜻으로, 제목 자체에 다소 비판적인 의미를 담았다 생각했는데 반응은 달랐다. 희곡이냐고 묻는 질문들. 인생 좀 사신 분 아시겠지만, ‘성공을 예감했다’고 했는데,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고, 좋은 예감은 대개 틀리고.
K-방역을 비판하는 글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러 번 말했듯이, 코로나에 대한 심리적 공기를 만들어낸 건 우리 사회다. 구체적으로 중산층이 갖고 있는 안전과 건강에 대한 태도나 담론이랄까. 이점이 핵심이다. 한국은 의료적으로 매우 활발한 나라다. 건강검진도 많고, 수술도 많다. 이런 분위기가 코로나에 대한 한국 사회의 특별한 태도를 결정지었다고 본다. '장르극, 코로나19'가 말하고자 한 바다. 그래서 글로벌한(?) 이야기가 많았다고도 할 수 있다. 정부는 결국 이런 정치 수요자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모든 것은 정확한 통계가 나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에세이를 잘 쓰는 사람이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에필로그를 쓰면서 그 말을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코로나라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글이라 내용적으로는 과학적인 글에 가깝고, 성격상으로는 사회적인 글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놀라실지 모르겠지만, 문학적인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읽는 분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모르지만, 쓰는 입장에선 전체적인 구상이 있었다. 계획상 끝에 왔다고 생각했다. 박수 칠 때 떠나야 한다면 평생 이 글만 써야 할 것이다. 여기는 어떤 박수소리도 들리지 않는 글의 묘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요양병원 같은 곳이다. 바탕에 어떤 사진조차 깔리지 않은 맨 얼굴로는 이 자리에 서 있기가 점점 어렵다. 더욱이 이런 글의 성격상 강제로 동원된 독자들이 있다. 그들을 감옥에서 풀어주어야 할 때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없다가 나중에 마음이 바뀌었다. 지인들이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하는 거라고. 그러다 끝날 수도 있고, 간혹은 자신의 독자를 찾아갈 수도 있다고. 평생을 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책을 읽는지 모른 채 그냥 서로 기분 상하지 않게 얕고 좁은 관계 속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모두가 관련된 사건 속에서 누군가의 생각을 삼십 번 정도 글로 정리하여 읽는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네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었어?’라고 정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그도 나쁜 일만은 아니다.
작년 5월 우연히 신원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 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였다. 가끔씩 과학책을 쓰는 저자들에게 감탄하지만, 율라 비스의 책은, 뭐랄까, 내용도 좋았지만, 글을 쓰는 스타일이랄까, 매혹되었다.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율라 비스가 글을 쓰면서,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말아요 / 추방자가 되세요〉라는 시구를 유념하려고 애쓴다’는 말이 떠오른다. 본문 뒤 미주에 나오는 말인데, 이어서 율라 비스는 ‘사적 에세이의 전통에는 추방자를 자칭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 전통에서 나는 시인도 아니고 언론도 아니다. 그저 에세이스트이고, 생각하는 시민이다.’라고 말한다. 당장은 이 말보다 더 적당한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앞에서 일부러 신원도서관이란 실명을 썼다. 사실 나는 그 도서관이 있는 도시에 살지는 않지만 도시의 경계를 넘어 그 도서관으로 가서 많은 책을 빌려 보고 있다. 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라 불리는 레닌그라드가 2차 대전 때 독일군의 포위 속에서도 도서관 문을 열었다는 말을 오래전 그 도시를 방문했을 때 들은 기억이 있다. 코로나 속에서도 도서관 문을 열어준 직원분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도서관이 문을 닫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거기까지는 아니었으면’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말을 하고 싶어 글을 올렸는지도 모른다. 혹시나 이 에필로그로 처음 ‘장르극, 코로나19’를 입문하는 분이 있다면 거꾸로 읽어가면서 앞에서 말한 ‘실수’를 확인하실 수 있다는 점, 망각의 무덤으로 가기 전에 드리는 마지막 안내 방송이다. 코로나가 잠잠해질 때까지는 유통기한이 남은 글이라 생각한다. 읽어주셔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