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칼 짐머가 쓴 '기생충제국'이란 책을 읽고 과학책에도 ‘크레셴도’로 점점 강하게 사람을 사로잡는 서사가 있다며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칼 짐머가 뉴욕타임스에서 코로나 기사를 지휘했다니 부러운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런 과학 기사들이 쏟아져 기초를 이루면 그 위에 사회적이고 인문적인 결을 지닌 코로나에 관한 글들이 많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코로나 상황이 워낙 압도적이라 세상이 쏟아내는 긴박한 말들을 받아쓰기 바쁘고, 마치 바이러스가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를 타고 놀듯이 과학과 비과학 사이에서 들려오는 무서운 소식들의 기세가 등등하여 입을 떼기가 어려운 시절이다. 그래서 ‘코로나는 언제 끝나나요’ 혹은 ‘백신은 언제 나오느냐’는 질문밖에는 할 줄 모르는 시대처럼 되었다. 나는 이 사태 속에서 궁금한 게 많았고, 동의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불량 시민은 아니지만 불만은 많았다. 그저 정부를 공격하면 되는 불만 정도라면 유튜브로 가야 했을 것이다.
9월에 중앙임상위원회라는 조직에서 기자회견을 취소한 적이 있다. 중앙임상위는 국립중앙의료원에 속하는 기구다. 유튜브의 가짜 뉴스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과학적인 증거로 말하려는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접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중앙임상위는 코로나에 대하여 사회에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결국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언론탄압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담론과 생각의 문제다.
중앙임상위의 기자회견 취소가 글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마스크의 시대에 코로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3차 유행의 폭발 속에서는 마스크를 더 조이고 말을 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가 ‘겁에 질린 시대’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겁에 질리면 모두가 얼음이 된다. 그럴 땐 현명한 말보다 아무 말일지라도 입을 여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말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해서 망설임 끝에 글을 올려보기로 마음먹었다.
말을 글로 표현하겠다는 뜻이다. 세상은 반대로 글을 말로 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어차피 다수의 의견에 스스로 반하고자 한다면 방법이 반대라고 큰 문제일까 싶다. 잃을 게 없는 자의 호기 같은 것이리라. 말과 글. 이 둘은 비슷하지만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메시지가 넘치는 세상에서 이 글도 빠르게 무덤으로 갈 것이다. 그렇다면 글의 묘지가 말의 묘지보다 조용할 것이므로 평화로운 곳에 눕는 것이 좋은 일이겠다.
중앙임상위의 이야기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지만, 중앙임상위의 르포를 쓰려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우리 사회 속의, 더 정확히는 ‘한국 사회’ 속의 코로나에 대하여 말하고, 또 묻고 싶은 것이다. 싸움의 와중이지만, 지금까지의 수를 복기하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를 생각해보고 싶다. 도발적이기보다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읽혔으면 싶지만 어떤 국면에서는 질문한다는 자체가 도발일 수 있다.
처음에는 안단테로 쓰기로 했다. 그러다 굳이 이 기묘한 전쟁의 와중에 나설 바에야 백신 개발 속도만큼 빠르지는 못하겠지만 프레스토로, 빠르게 쓰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마음이 바뀌었다. 아침에 깨어나 혹시 김은숙의 드라마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묻고 싶은 기묘한 세상에서 다소는 무모한 여정의 돛을 올리는 셈이다. 어지러운 말 하나를 보태는 일이겠으나 그렇다 해도 백신이 저기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