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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 프란치스코 Dec 20. 2020

장르극, 코로나 19

1, 장르극, 코로나19

 코로나 19로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좀 더 담대하게 코로나에 대처할 것을 권유한 전문가 집단이 있다. 중앙임상위원회라는 조직이다. 정확히 말하면 국립중앙의료원 신종감염병 중앙임상위원회이다. 2020년 2월 26일 기자회견에서 중앙임상위는 중국 CDC 자료를 근거로 임상 결과를 발표한다. 중국의 임상 사례를 보면 경증 환자 3만 8천여 명의 경우에서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고, 6천 백 명 정도의 중증 환자에서도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언론이나 SNS 상에서 코로나를 흑사병인 양 다루고 있었는데 이런 말이 있었단 말이지?


 2월 26일이라면,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이 정례 브리핑에서 대구 신천지 사태로 말미암아 신규 확진자가 253명 늘어나 확진자 누적 총계가 처음으로 1,000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던 때이다. 한국 사회의 두려움이 커지기 시작할 때 누군가는 그렇게 두려워만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중앙임상위 오명돈 위원장은 코로나로 인한 폐렴 증상이 다른 폐렴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고도 했다. 실제 폐렴이 진행 중임에도 환자는 폐렴 증상을 잘 느끼지 못하며 사진 판독으로는 깜짝 놀랄 만큼 위중해 보여도 콧줄을 통해 산소를 공급해주며 안정을 취하게 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환자 스스로 회복을 한다고 말했다. 참 위안이 되는 말이다. 중앙임상위 위원들끼리 사적으로 혹은 비공개로 나눈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들 코로나19를 페스트라도 되는 것처럼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때, 공개적으로 기자회견장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위안의 말을 듣는 대신 입과 코뿐만 아니라 귀까지 마스크를 두르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무서운 바이러스가 퍼질 때 바이러스는, 우리 몸에 들어와 자신을 복제하듯이 우리 마음을 숙주 삼아 우리 안에 공포와 두려움을 복제한다. 코로나 초기에 일부 사람들이 주장했던 봉쇄령은 당시 우리가 가진 두려움에 가장 어울리는 해법일 수 있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를 어떻게 차단할 수 있을까? 마스크와 고글을 쓰고, 장갑을 낀다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가장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은 바이러스를 종식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바이러스 종식을 목표로 한 방역 대책을 세우고 총력전을 펼친다.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 - 정확하게는 ‘에이즈와 그 은유’ - 이란 책에서 오늘날 군사적 은유가 넘친다고 지적하며, 전쟁을 ‘소요 경비와 실제적인 결과를 잘 따져보지 않는 몇 안 되는 행위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코로나 2020'이라는 블록버스터 영화 세상에서는 누군가를 만나면 너와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마스크를 쓰고, 내미는 것은 주먹이 되었다. 그렇다, 이건 전쟁이다. 방역이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되면서 코로나는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막아야 할 적이 되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 바이러스를 끝까지 추적하고 찾아내서 박멸해야 한다. 그런데 바이러스 종식, 즉 바이러스를 뿌리 뽑는 일이 바라는 목표기는 하나 현실적인 목표이기도 할까? 2020년 6월 21일 중앙임상위는 기자회견에서 코로나 완전 종식을 목표로 한 방역 대책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전시하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말한 사람이 잘못이었을까? 오히려 들은 사람들이 ‘왜?’라고 묻지 않는 것이 잘못 아니었을까? '왜, 이런 말을 하지?' 궁금할 법도 했는데, 본능적으로. ‘왜’는 종교의 몫이고 ‘어떻게’가 과학자에게 합당한 질문이라서 예의를 차리느라 묻지 않았을까? 


 앞서 말한 2월 26일 중앙임상위 기자회견에서 그래프가 등장했다. 여러 차례 코로나 관련 기사에 등장한 그래프다. 만약 코로나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환자수가 급속히 증가하여 환자 발생 곡선이 가파르게 올라간다. 병원을 찾는 환자수가 많아지며, 전체 감염자 수에 비례하여 중증 환자도 늘어난다는 뜻이다. 코로나 중증환자를 치료하려면 외부와 차단된 중증환자 치료병실이 필요한데, 치료병실을 꽉 채우고도 병실이 모자라게 되면, 차단시설이 없는 일반병실서 환자들을 치료하거나 아니면 병실이 새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수밖에 없다. 기다린다는 이야기는 당장은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일반병실서 중증환자를 치료하면 병원 시설 자체가 코로나에 감염되고 그러면 그 병원은 폐쇄될 가능성이 높다. 치료할 사람은 점점 늘어나고 치료할 수 있는 의료자원은 오히려 줄어든다. 이것이 감염병에 의한 의료 붕괴다. 설명을 추가할 수도 있는데, 시나리오 상 더 두려운 결론을 담고 있다. 감염병(코로나19)으로 의료 자원이 쏠리고 중환자실이 감염병 환자들로 채워지면 다른 질병으로 병원을 이용해야 할 환자들도 제 때에 치료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의료 붕괴는, 앞에서 설명한 환자수 증가를 나타내는 종모양의 그래프가 위를 향해 뾰족하게 높아져 그 사회의 의료 역량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게 될 때 발생한다. 따라서 환자 발생 곡선이 올라가면 그 곡선을 눌러 완만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영어로는 ‘flattening the curve’라고 한다. 코로나 초기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려 제대로 마스크를 공급할 수 없게 되자 한동안 요일별 구매로 돌린 것도 마스크 공급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이것에 해당한다. 하루에 주면 좋을 것을 일주일로 나눠주니 시간이 걸린다. 마스크는 빨리 주면 좋지만, 바이러스는 천천히 퍼지는 것이 좋다. 속도 조절이다. ‘flattening the curve’란 감염병 확산이 안단테로 진행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곡선을 누르는 행위가 방역적 개입이다. 방역적 개입이 언제나 의료 붕괴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로 노력을 했지만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언론과 방역 당국의 설명으로 의료 붕괴란 용어가 소개되면서, 이제 우리 사회는 두 단어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코로나와 의료붕괴. 특히 의료 붕괴는 전문가와 대중 모두 현실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되었다. 대중이 의료 붕괴를 염려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단지 바이러스를 무서워하는 것보다는 치료의 서사를 알고 그 과정을 이해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서사의 결말인 ‘붕괴’에 대해서는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두려운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백신과 치료제가 필요하고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애초에 감염을 차단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백신과 치료제가 없는 세상에서 차선책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 바이러스를 막는 일이다. 문제는 전파력이다. 사스나 메르스처럼 전파력이 낮다면 감염자를 빨리 찾아내서 고립시키고 뿌리를 뽑는 것이 가능하지만, 코로나19는 전파력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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