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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 프란치스코 Dec 21. 2020

장르극, 코로나19

2.  2019년을 그린 블레이드 러너

 전파력이 높은 바이러스의 전파력을 억제하겠다는 것은 훌륭한 목표이면서 대담한 목표이다. 아주 높은 강도의 방역대책을 요구하는 쉽지 않은 일이다. 목표를 조금 낮추면 어떨까? 감염병의 전파를 어느 정도는 감내하면서 코로나19에 걸린 중증환자들을 잘 치료하여 피해를 최소화 하자는 생각도 나쁜 목표라 할 수는 없다. 중증 환자 중심으로 의료 자원을 집중하면서, 함께 환자 발생 곡선을 완만하게 할 조치를 취하자는 생각은 한편으로 사회가 어느 정도 그 기능을  유지하면서 감염병에 대처하자는 발상이다. 사회가 어느 정도의 기능을 유지하느냐는 그 사회가 질병에 대한 위험도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 사회의 일부에서 봉쇄에 대한 요구가 있었지만, 한국 사회는 봉쇄(containment) 조치 대신에 완화(mitigation) 전략을 취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우리가 선택한 방식이 완화 전략이라면 왜 의료계 일각에서 완화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하자고 말했을까? 한국의 방역 정책이 외부적 국경 봉쇄나 내부적 록다운(lockdown) 같은 봉쇄 전략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바이러스의 ‘전파를 차단하겠다'는 고난도의 목표를 설정했다. 수단은 완화나 목표는 봉쇄다. 완화 전략으로의 방향 선회란 어느 정도의 전파를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중증환자 치료 중심으로 전략을 바꾸자는 의미다. 하지만 코로나에 대한 국내의 여론과 대응은 그 수위가 높았다. 


 방송에서는 코로나에 대한 보도가 뉴스 첫머리를 장식하고, 전체 뉴스 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코로나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인 사람들을 확진자라 부르게 되었고, 이 확진자를 중심으로 감염자에 대한 정보와 동선을 보도하였다. 바이러스 행성에서 온 눈에 보이지 않는 침략자들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침략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담지자들은 보인다. 바이러스의 담지자들을 확진자라 이름 붙이고 이들을 찾는 일이 시작됐다. 2019년을 그린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가진 바이러스 레플리컨트를 추적하라. 그들이 어디에 나타났고, 어디서 머물렀으며, 어떤 루트를 이용했는지 상세히 보도했다. 한국 사회가 '코로나2020'이라는 재난 영화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다른 한편 일부에서는 한국 정부의 정책이 더 강력했어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봉쇄 정책을 취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부적 록다운보다 주로 국경 봉쇄를 의미한다. 하지만, 초기의 봉쇄 조치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사후에 말하기는 쉽지만 봉쇄는 매우 강력한 특단의 조치다. 특히 중국과의 왕래가 2014년 이미 천만 명을 넘어선 수준이고 2019년에는 2천만을 넘어섰다. 이 정도 규모의 인적 교류를 봉쇄한다는 것은 확산 초기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문제다. 어마어마한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여파를 감내해야 한다. 이렇게 특단의 조치를 취하고서 코로나를 막을 수 있다면 고려해볼 여지가 있겠지만, 그 효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기본적으로 당시 WHO에서도 봉쇄를 권하지 않았다. 경험적으로 국경 봉쇄가 감염병을 막아 주지 못한다. 봉쇄를 하면 사람들이 못 들어온다고 생각하지만, 관리되지 않는 루트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어디서 감염병이 발생했고, 어떻게 퍼지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면 대책을 세울 수가 없다. 아직까지도 초기 봉쇄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런 확신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일부 보건 의료 전문가도 그런 주장을 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전문가들이 필요하고, 감염병 자체만 놓고 본다면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방역은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이다.  


 한국 정부의 보건 당국은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받았다. 공기까지 차단해야 하는 고난도 방역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초기에 봉쇄 정책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정부의 대응은 선제적이고, 체계적이었다. 또 하나 좋았던 점 중의 하나는 초기 대응에서 전문가들과의 협력이 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성공적’인 방역은 해외에서도 칭찬을 받았고,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K-방역’이란 말이다. K-방역의 성과에는 시민들의 협조가 뒷받침되었다. 코로나 확산 초기부터 지하철을 타보면 놀랍게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 미디어는 이를 칭찬했고, 우리가 이렇게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은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방역정책이 길어지면서 정부가 방역 독재를 한다든가, 방역을 빌미로 자유를 제한하려 한다는 등의 ‘고급한’ 주장이 등장하기도 했다. 일상적인 수준의 조치가 실제로는 통치 방식의 길로 이어지거나 혹은 그것의 반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연상시키는 발언이다. 발상의 고급스러움에 비추어, 처음에는 봉쇄를 하지 않았다고 정부의 태도를 비판을 하다가 이제는 방역이 과도하다고 비판을 하는 것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동일하다면 일관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비판들은 일차적으로는 보건 당국을 비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정부에 대한 공격이다. 그렇다면 K-방역의 실소유주는 정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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