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단 Mar 11. 2016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방인 2

도단에세이

   비가 내리는 여름 오후였다. 더위가 가시고 봄기운이 밀려오듯 공기는 산뜻했다. 빗방울은 수줍게 땅으로 떨어졌다. 나는 엄마와 함께 동네 은행에서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에도 있던 서점을 지나가는데, 엄마가 갑자기 내 옷을 꽉 붙잡았다. 그러면서 소리를 죽이곤 “어머, 어머” 하는 것이었다. 뭐지. 왜 그러지. 엄마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저기 봐.” 하고 말했다. 앞을 향한 엄마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그제야 앞을 쳐다봤는데, 정말로 기이한 여자를 보았다.


   사실 묘사를 잘 할 자신이 없다. 나는 내 자신이 묘사를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무엇보다도 그토록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진 여인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감이 집히지 않는다. 여하튼 나는 이십 삼년을 살면서 그토록 압도적인 아우라를 가진 여자는 처음 보았다. 분홍색, 내 기억에 아마 키티가 그려져 있던, 우산에, 분홍색 긴 치마를 입고 분홍장화를 신은, 정리되지 않은 긴 백발을 풀어 헤친 채,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춤추듯 살짝살짝 몸을 뒤틀며 걸어오던 노년의 여자.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뭐지. 그리곤 얼핏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원래 웃고 있었기 때문에 웃는 것인지, 아니면 나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또 다시 얼어붙었다. 뭐지.


   그 이후 우리 세 모녀는 동네에서 그 분을 자주 마주쳤다. 그 분은 생각보다 활동 범위가 넓었다. 1편에 등장한 지인분이 말하길, 그 여인을 시내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인분이 운영하던 카페에 온 일도 있었다고 했는데,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시고 계산까지 정확하게 하셨다고 한다. 다만,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시더라고. 나는 번뜩이면서도 우아하게 웃으며 아메리카노를 계산하는 그 여인을, 누구와 대화하는지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이야기를 나누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 속의 여인은 혼자서 활기가 넘쳤다. 혼자 재잘재잘 떠들었고, 혼자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갑자기 속이 울렁였다.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좀 이상했다. 나는 그 모습을 상상속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 분을 상대하게 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몇 일 전, 카페 사장님이 “오늘은 또 왜 오셨어.” 하며 난감한 듯 웃으셨다. 하필 손님이 많았던지라 바쁜 와중이었는데, 누구를 보고 하시는 말씀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그 분이 와계셨다. 나는 정말 내 눈을 의심했다. 정말인가. 정말로 그분이 여길 오셨단 말인가. 내가 주문받고 서빙하고 다 해야 하는데, 나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들었다. 인디언 핑크빛에 흰 털이 달린 코트를 입고, 까만색 긴 항아리치마를 입고, 털부츠를 신고 우아하게 웃는 그녀가 춤추듯 몸을 뒤틀며 들어왔다. 그녀는 특유의 우아한 걸음을 늦추며 벽에 걸린 핀업걸 사진을 살피더니, 곧 계산대로 왔다. 나는 오는건가, 정말로 오는건가, 정말 내가 계산을 해야 하는건가 하고 긴장하며 여인의 동태를 살폈다. 그녀는 계산대 근처에 있는 작은 소품들을 살피고 있었는데 나는 그제야 그녀가 꿈꾸는 듯한 눈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세히 보니, 눈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꿈을 꾸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하늘한 걸음도, 그 우아함도. 내가 그렇게 방심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여기, 카푸치노 있어요-?” 하고 기습질문을 했다. 아주 또렷하고, 가볍게 노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로.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는데, 그 순간, 정말 신기하게도, 그녀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어떤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멀리서 보이던 주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주름 하나 없는, 까만 눈이 또렷하게 빛나고 있는, 이 세상을 초월해버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할머니잖아. 그것도 정신이 이상한 할머니잖아. 아닌가? 아니던가? 내가 잘못 알고 있는건가? 엄마한테 말해줘야 하나? 아니야, 엄마.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나는 당황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최대한 몸에 힘을 줬다. “네, 있어요. 사천원입니다.” 여인은 차분히 지갑을 꺼냈다. 옆에 다른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본인만의 여유로운 페이스로 지갑에서 돈을 세었다. 지갑 안에는 여러 개의 카드가 있었고, 그녀는 정확하게 반으로 접힌 천원짜리를 한 장씩 꺼내 네 장을 건네주었다. “설탕은 두 개만 줘요-.” 하는 세련됨도 빼놓지 않았다. 그 노래하는 듯한 말투에 홀려 “네-”하고 그녀처럼 대답해버렸다. 그녀는 우아하게 자리를 잡았고, 나는 바쁘게 사장님을 도와드리고 서빙을 했다. 그녀에게 서빙을 할 때에는 정말 떨렸는데, 이걸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아직 내 단어선택능력은 많이 부족하다. 여하튼, 맛있게드세요- 하는 내 말에 고마워요- 하고 답하는 그녀를 보며, 반지가 여러 개 끼워져 있는 주름지고 가느다란 손으로 설탕 스푼을 집는 모습을 보며 내가 정말 착각하고 있던 걸까, 정말 그냥 우아함을 즐기는 그런 분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장님은 그 여인이 이 년 전부터 여기에 오셨다면서, 이 년 전부터 혼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다면서, 그 때도 분홍색을 좋아했고 그 때도 세상에 다시없을 우아함을 뽐내고 다니셨다면서 웃으셨다. 간간히 그녀가 앉은 테이블을 돌아봤고, 그 때마다 그녀는 정말 믿을 수 없게도(그런 장면을 직접 보는 건 개인적으로 처음이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간혹 조곤조곤 말을 할 때도 있었고, 제일 많이 하는 것은 뭔가를 잃은 듯한 눈으로, 그러나 여전히 꿈을 꾸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두 시간을 앉아 있다 나갔고, 카푸치노잔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카페에는 큰 베틀이 있는데, 예전 자수를 놓는 일을 하시던 사장님이 가지고 오신 물건이라 했다. 하루는 그 여인이 베틀을 가리키며 이게 영국에서 러시아에 무슨 반도로(그 반도 이름은 사장님이 알려주셨는데 잊어버렸다), 그 반도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거라면서 정말 귀한 물건이라 하셨다고 했다. 그 반도는 실제로 있는 곳이며, 베틀은 러시아에서 들어온 물건이 아니라는 게 사장님의 말이다. 어쨌든 반도를 유창하게 읊었다는 사실을 듣고 엄마는 아무래도 과거에 한 가닥 하신 분 같다며 교사이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여하튼 좋다. 그녀가 우아하게 반도의 이름을 말하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충격적이었다.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카페의 조명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일까. 여하튼 확실한 건 그녀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고, 아마 그 꿈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꿈속을 걷는 그녀는 현실을 사는 우리를 자신의 꿈으로 끌어들이는 재능이 있었고, 그 꿈에 이끌린 나는 경계에서 휘청이며 그녀의 아찔한 우아함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카페 문 밖에서 서성이던 그녀는 그 다음 길을 찾는 것 같았다. 살짝 턱을 치켜 들고 팔짱을 낀 채 춤추듯 걷던 그녀는 다시 다른 사람을 낚으러 떠날 것이다. 이상하단 걸 뻔히 알고는 있으나 그냥 지나치기엔 어딘가 찝찝한 미늘을 챙겨든 채,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방인이 되어서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방인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