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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단 May 01. 2016

집나방

썰전을 볼 때마다 하는 생각. 전원책 변호사는 현실적인 이상주의자 같고, 유시민 작가는 꿈꾸는 현실주의자 같다. 닮은 듯 하지만 아주 미묘하게 다르다.


   오늘 알바를 하다 처음으로 울 뻔했다. 네 시간 동안 한 번도 앉아서 쉬질 못했다. 손님이 너무 많았고 주문은 밀렸다.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싶었다. 알바기간 처음으로 서러웠다. 내가 하겠다고 결심한 알바였는데. 손님이 있는데 울 수가 없어 그냥 참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중학교 때 이후로 지금껏 늘 했던 생각이었다. 나는 왜 행복할 수 없을까.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저렇게 아무 걱정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물론 바보같은 생각이다. 모두가 각자의 짐을 지고 있으니. 하지만 숨겨진 것은 밖으로 쉽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나는 칠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슴을 두 손 위에 올려놓고 살아야 했다. 손 아래로 내려 놓아본 적이 없었다. 마음이 편해지면, 어딘가 평온해지면, 이상하다 이게 내 행복이 아닌데, 나는 행복하면 안 되는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렇다. 왜 나는 한 번도 행복할 수 없을까.


   엄마는 약을 먹고 잠들어 있었다. 동생은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위해 맥주 한 캔과 팝콘을 사왔다. 내가 울 뻔한 그 시간, 이렇게 맥주를 따는 이 시간에 누군가는 죽어갈 것이고 누군가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 없을 것이고, 누군가는 떠난 이를 떠올리며 슬퍼할 것이고, 누군가는 폭력의 압제 아래에 고통 받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더 슬퍼진다. 그것을 떠올리면 가슴이 더 무거워진다. 왜 누구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고, 누구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날이 서도록 노력해도 행복할 수가 없을까.


   요즘 들어 집나방이 갑자기 많아졌다. 왠만하면 벽에 붙어서 꼼짝도 않는 녀석들이 요즘 팔팔하게 날아다닌다. 청소도 열심히 하는데 어디서 이렇게 많이 모여드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중 한 놈이 지금 내 물컵에 빠졌다. 수면 위에서 어른거리던 놈이, 수면에 발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간을 보던 놈이, 아 여기 뭔가 좋아 보인다 싶었던 걸까. 그대로 몸에 힘을 풀어 버렸고, 그리하여 빠져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놈은 물컵 위에서 잠시 맴을 돌았다. 계속 날개짓을 했고, 그럴수록 날개가 젖었고, 다시 힘이 빠져 수면에 납작히 붙어 버렸다. 내가 이 녀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심지어 나는 수면을 향해 내 스스로 돌진한 적이 없다. 나의 뭔가를 수면에 내어 준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왜 수면에 납작히 붙어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걸까.


   컵 옆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또 다른 집나방이 편하게 앉아 있다. 물위에 죽은 듯 고요히 떠 있는 놈은 자신의 분비물로 수면 위에 최후의 흔적을 남겼다. 그러던지 말던지 컵의 물을 버려야겠다. 나방도 죽겠지. 나는 책을 읽을 것이고. 세계는 고요하고. 변하지 않는 채로. 이 세상은 카오스일까.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카오스인걸까. 어쨌든 내 생각에 세계에 질서란 없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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