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단 Aug 16. 2016

페소아와 페소아들

몇 주 전에 사람을 죽이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나는 꿈속에서 경찰에게 쫓겨 초조했으나 사실 좀 뿌듯했다. 그래. 살면서 사람도 한 번 죽여보고 그래야지 않겠어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꿈에서 깨면서 경찰과 언론에게 쫓기는 연쇄살인을 벌인 이들을 생각했고 그들이 좀 안 되었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죽이고 싶고 교도소에서 몇 년을 살고 오면 되는지 셈도 해본다. 타겟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관있다. 미학적인 살인을 위해서라면 가장 사랑하는 이를 죽여야 할 텐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제일 먼저 죽여야 하는 것은 나일텐데 그 생각에 조금 시무룩해졌다. 타인을 죽일 수는 없단 말인가. 하기야 나에게 누군가 칼을 쥐어 줘도 꿈에서 깨어난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뿌듯하다. 나는 꿈에서라도 누군가를 죽여 보았다!

엄마는 정신과를 가고 싶다는 나의 말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진심인데. 이러다 정말 내가 죽거나 누군가가 죽거나 할 것만 같다. 사실 누군가가 죽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고, 그 사이에 내가 견뎌야 할 괴로운 시간들이 걱정이 된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아빠 때문에 정신과를 갔으나 그 때는 증상이 심하지 않았다. 거의 없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단지 엄마의 모정 때문에 갔던 것인데, 그 때는 그냥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 가야 할 것 같고, 아무도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가야 한다. 내가 견뎌야 하니까. 앞으로도 견뎌야 할 것이고 견디지 않으면 죽어야 할 테니까.


동생이 사준 <피아노 치는 여자>라는 책은 읽다가 덮었다. 묘사가 끝없이 이어져 지루했다. 동생에게는 정말 고맙고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정말이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어떻게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지 의문이다. 이해할 수 없다. 플롯에 큰 변화도 없고 획기적이지도 않다. 나는 작가의 말대로 페터 한트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는데, 얼마 전 그의 작품 중 하나인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읽었다. 언어실험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해가 쉽게 되지 않았으나 내 맘에 아주 들었다. 아주 괜찮은 작품이었다. 나는 한트케가 느끼는 것처럼 때로 언어에 부조리함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고(인간이 만든 것 중 그렇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한트케는 횡설수설하는 듯한 플롯 자체로 언어의 부조리함을 보여줬다. 언어의 사회화는 늘 옳은 것이 아니다. 지금은 페소아를 읽고 있다. 워크룸프레스는 역시나 좋은 책을 출간한다. 하지만 페터 한트케의 책처럼 리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페소아라는 작가의 사념이 워낙 뛰어나서 그의 생각을 따라가는 데 힘이 부친다. 일주일 째 읽고 있다. 그런데 겨우 반을 읽었다. 젠장. 난 한참 멀었군. 하지만 정말 마음에 든다. 꼭 읽어보시길. <페소아와 페소아들>로, 그는 시인이지만 소설가보다 산문을 잘 쓴다. 아 정말 마음에 든다. 정말 천재다. 다만, 급진적인 부분도 있으므로 기독교인들은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보수주의자인 것 같다. 아주 흥미롭다. 아주 마음에 들어. 그런데 어떡하지. 나는 이제 겨우 페소아를 반 밖에 못 읽었고 이 세상에 좋은 책은 너무나 많고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고 발터 벤야민에 도전하고 싶고 사실 저번에 도전했다 덮었고. 여하튼 페소아의 책은 올 해 읽은 책 중 손에 꼽게 좋다.


손님 중 한 분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 반지를 없애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를 없애는 행위의 의미를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은 존재하는가? 반지를 어떻게 없앤담. 쓰레기통에 버려서? 그래 봤자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게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녹여서? 녹이고 나면 반지가 사라지는 것이 되는가? 녹인 형태의 반지가 되는 게 아닌가? 사람은?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역시 죽는 것일 텐데, 그래서 죽고 나면 정말 사라지는가? 육신이 썩어 자연과 합일이 되거나 그렇지 않다면 납골당에서 가루가 된 채로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페소아에게는 아주 당연한 유물론적 사념이겠으나 나는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페소아는 회의에 빠진 유물론자가 아니고,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유물론자였다. 나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회의에 빠지지 않고도 유물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어도, 사물 그 자체 뒤에는 무엇도 없음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유물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을 이성적으로 바라보지 않음으로서, 있는 그대로 관찰함으로서 유물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너무나 많은 각도로 사물을 보려 했고, 그 뒤에 숨은 함의를 찾아내려 애썼다. 그러다 보니 서로 대립하는 자아가 생겨났고(이중인격이 되었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그 때문에 고민했다. 페소아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설령 대립하는 자아가 생겨나도 그것이 좋은 것이라 여겼다. 모든 자극을 품에 안을 수 있는 인간이 훌륭하다고 여겼다. 페소아의 여러 자아들은 니체를 사랑하면서 싫어했다. 나는 그것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오류 없는 단일한 자아는 인간적이지 않다. 그것은 죽은 인간이다. 시체다. 사실상 많은 이들은 충돌하는 자아를 갖고 있고 그것이 인간을 불행 속으로 또는 행복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나는 소설을 쓴다. 충돌하는 자아들을 목격한다. 나는 여기에 있으나 여기에 없다.


요즘은 내가 중력권을 벗어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내 생각도, 몸도 무게감 없이 공중을 부유하는 것 같다. 너무나 가볍고 흔들거리고 어지럽다.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진다. 간혹 머리가 아프고, 밥을 먹고 싶지 않다. 술이 마시고 싶고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싶다가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피우고 싶다. 잠은 쉽게 들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잠들고 싶다. 졸립기 때문이기도 하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꿈도 곧 현실이 된다.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술 취한 여자가 모는 자동차에 쫓기는 꿈을 꾸었다. 옛날 서부영화에 나올 법한 오밀조밀한 집들이 늘어져 있었고, 곧 문을 박차고 총을 든 카우보이가 뛰쳐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말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내 옆에는 알 수 없는 고급 승용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검고 화려한 승용차 안에는 젊은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삼십 대?) 그을린 피부에 여유가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남자의 수염을 보며 남미에서 살면 좋을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나의 뒤에는 미친 차가 속력을 내며 달려오고 있었고, 나는 그 부부가 죽을 걸 알면서도 피하라고 말하지 못하고 얼른 달렸다.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을 법 할 때, 내가 예측한 시간이 되었을 때, 부부가 참사를 피하지 못했을 법한 그 시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멈춰 세웠다. 공포에 젖은 인간은 움직이지 못한다. 나는 그대로 굳어 고요를 느꼈다. 온 세상이 고요 속에 잠겼고 나는 뒤돌아보지 못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그렇게나 큰 공포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곧 나는 일어났고 내 위를 밟고 뛰어 다니는 봄이의 무게를 느꼈다. 때로 꿈은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다. 꿈속에서 사람을 죽였을 때에는 손끝에 타격감이 전해지는 것 같았고, 끔찍한 벌레를 목격했을 때에는 그 벌레가 여전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내 귓가에는 여전히 지옥을 달리는 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아침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기어코 아침은 찾아오기 마련이고 나는 좆같은 꿈에서 깨어난 것에 안도하며 현실을 품에 안는다. 그러나 현실은 꿈보다 더 좆같기 마련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고마운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