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내지 말아야 할 것을 탐낸 죄

나를 읽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by Min kyung

엄마의 직업은 미용사였다. 그녀의 인생이 미용사로 풀리기 전에 그녀도 숱한 일을 겪고 겨우 그녀의 밥벌이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아마 그녀가 세상에 홀로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인 것을 쓰라면 숫제 책 한 권이 나이 나오고도 남는다. 잠시 그 삶을 들었을 뿐이었는데 겪어온 삶이 내가 상상할 없을 만큼 힘든 것이었음을 알았다. 어찌어찌해서 그녀도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다. 남편은 배를 타고 멀리 집을 떠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도 밥벌이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예민한 감수성 가진 인간이었을 것이다.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과 세심한 생각이 세트로 나와 불안과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해 엄마는 그런 부분까지 보듬어 줄수 없었다. 제대로 치유되지 않은 사건들은 겉보긴엔 아무렇지 않겠지만 유리 조각처럼 어딘가를 떠다니는 중이다.


최초기억은 여섯 살부터 시작된다. 여섯 살이 집에서부터 버스를 몇 정거장 타고 와서 엄마의 직장까지 도착하는 미션을 받곤 했다. 누군가 버스를 태워주면 엄마는 도착 정류장에 기다리고 있다가 버스 안의 아이를 픽업하는 시스템을 생각해 낸 것이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탈 것을 타고 잠들 수 있는 안도를 느껴보지 못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과연 내가 올바로 정류장에 내릴 수 있는지를 불안해했다.


두 번째 트라우마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엄마 미용실에서 일하던 언니를 따라 언니 고향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지금 생각해도 6살 아이를 친분이 있는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가려고 버스를 내렸고 돌아갈 땐 어떤 버스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화장실로 돌아가 모든 문을 열었다. 아마도 같이 탄 언니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아직도 생각난다. 큰 볼일을 보던 아저씨의 당황스러운 표정. 이젠 웃을 수 있지만 한 동안 그 순간의 패닉상태는 잊을 수 없었다.


여덟 살쯤 되던 해 크리스마스에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카드를 보냈다. 우편물을 동시에 보냈겠지만 아마도 도착이 동시에 되지 않았나 보다. 우연으로 그럴 수 도 있다. 하지만 어린이 생각에 내 것만 빠진 크리스마스 축하카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어있었다. 슬펐다. 그리고 마음을 어떻게 추스렀는 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신체 발달이 빨랐던 나는 초등 고학년에 사춘기를 겪는다. 초등고학년을 지나면서 또래들과 어울리는 것을 멀리했다. 그때부터 누군가와 잘 지내는 것이 힘들어졌던 것 같다. 중등이 되어 친구들이 있었지만 열등감을 그 복 하지 못했다. 마음은 항상 앞서 있지만 성과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나올 수 없었다. 내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태였다. 이때부터 내 모습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상태가 폭발하곤 했다. 심하게 짜증이 많아졌다.





아버지의 부재도 길었다. 엄마는 혼자서 일을 하고 육아를 하느라 바빴다. 육아라 해도 그녀의 입장에선 잘 먹고 잘 지내는 일이 전부였다. 감정을 읽을 능력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처리는 어떻게 해 줘야 하는지 무지한 상태였다. 하지만 예민한 아이는 감정이 생기는 과정을 겪고 때로는 서운함, 때로는 불안, 그냥 속에서 치미는 분노를 다 속에다 쌓아두기만 했다. 알아주는 이가 있어 수용되는 과정이 항상 생략이었다. 맘에 들지 않는 이유를 누군가에게 책임 지워야 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들은 누군가 알아주어야 하지만 대상은 없고 마음대로 책임전가하고 있었다. 가족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흡수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갈망했다. 누군가라도 그냥 조건 없이 알아봐 주고 읽어주고 들여다 봐 줘야 하는 사람을 원했다. 일반적으로 이것이 가능한 누군가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나에겐 없었다. 내가 줄곧 갈망해 온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고, 그런 존재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마음껏 방황하는 시간이 줄었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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