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생각이 스친 상담
오늘은 꼭 의료사회복지 상담 일기라기 보단 그냥 나도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또 언젠가 부모가 될 예비 부모로서 마음이 아팠던 사연 때문에 떠오른 그날의 상담을 기록해두려 한다.
연세 지긋하신 대장암을 진단받은 남자 환자분이셨다. 배우자는 오래전 떠나보내고 공부 잘하는 세 딸 모두 부족함 없이 키워내시려고 본인 가지신 거 다 쏟아부어 좋은 직장에 취직도 시키고 결혼도 시키셨던 분이셨다. 이제 할 일 다 했다 하고 큰 숨 쉬시려는 때, 예고 없이 암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5년 넘게 수술과 항암을 병행하며 잘 버텨왔지만 기존에 사용하던 치료제로는 더 이상 상태의 호전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이제 남은 마지막 방법은 고액의 비급여 항암 약제를 사용하는 것.
때문에 사회복지실로 약제비 지원을 문의하러 오신 참이었다.
약제비를 지원해주는 사업들은 있지만 경제적 지원은 늘 그렇듯, 주관적인 경제적 어려움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객관적인 경제적 어려움을 본다.
본인의 소득과 재산과 금융재산에, 사업에 따라선 부양의무자의 경제적 기준도 확인해야 한다.
열심히 잘 키워낸 자녀들이 어엿하게 좋은 직장에 가 있는 건 기쁜 일이었지만 고액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지원을 문의하러 온 곳에서는 그 사실이 달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고액 진료비를 부담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임이 맞다. 그래서인지 환자 분은 자녀들에게 이런 상황을 언급조차 하지 못한 상태인 것 같았다.
건강보험료를 납부하시는 정도를 확인해보려고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보겠다 하시는데 당차게 '내가 지금 전화 걸어볼게' 하고 얘기하신 것과 달리 환자분은 그 누구보다 어렵고 조심스럽게 자녀와 통화를 시작했다.
떨리는 손과 음성에서 환자분이 자녀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어려운 일인지가 찰나에 느껴졌다. 본인의 생사가 걸려있는 치료와 관련된 상담을 받고 있는 중에도 결국 제대로 해야 했던 말은 다 내뱉지 못하시고 '날이 덥고 바빠도 건강 잘 챙기라'는 말로 자녀를 다독이며 전화를 끝맺으시던 환자분...
본인은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자녀를 키웠지만 그렇게 키운 자녀에게 본인을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고 또 미안한 부모님의 마음인 것이 느껴졌다.
한 번의 짧은 통화로 부녀관계를 짐작할 순 없지만 진료비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러 상담실에 왔다는 환자의 연락을 받고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딸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서 내가 괜한 심술이 났던 것 같다.
심술이 난 자아는 의료사회복지사로서 말고 그냥 나도 한 아버지의 딸인 입장으로서.
부모는 낳으시고, 기르시고 온 힘을 다해 우리가 세상에서 버텨나갈 수 있도록 애써주신다.
우리는 그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분도 부모이기 이전에 한 개인이었고, 삶이 있고, 꿈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제 다 살았지 뭐.'
'자녀들까지 힘들게 해감서 치료받을 건 뭐가 있겠어..'
하고 나가시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나를 위해 희생해온 부모님의 지난한 세월들을 짧게나마 내가 보답해드릴 수 있는 시간들이 있음에 우리는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아주 사적인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던 상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