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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 Jul 15. 2022

2. 천천히, 오랫동안 지리산이야기

두번째 휘게이야기


지리산.


한국지리에 유독 약한 나랑 동생이지만,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후부터 30여년의 세월 동안

줄곧 엄마 아빠를 따라 매년 지리산을 다녀왔기 때문에 계곡, 산능성이 굽이굽이 추억이 내려앉아있는 지리산은 발길 닿는 곳마다 왠지 익숙함이 느껴진다.



엄마 아빠한테 최고의 데이트 코스이자

우리가 태어난 후로는 또 도심을 떠나 최고의 안식처를 제공해주기도 했던 지리산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이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더 튼튼하게 확장된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 구성원들과 또 다른 추억을 쌓아갈 수 있는 무궁무진한 여지를 주고 있어 단순히 물리적 공간 이상의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천은사에서



엄마는 지리산 노루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정말 지리산을 사랑한다.


지리산으로 드라이브를 가거나, 지리산 등산을 가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설레하는 엄마 모습만 보아도

우리가족이 아닌 그 누구라도 그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엄마아빠가 새벽까지 늦게 일을 하던날이었더라도, 다음날이 지리산에 가는 날이라 하면 우리에게

엄마아빠가 젊은 시절 봐왔던 거의 그대로의 멋진 지리산의 풍경을 보여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새벽같이 뜬눈으로 출발했던 기억이 있다.



지리산의 봄

봄의 계절에 지리산은 십리벚꽃길을 빼놓고 논하면 너무 섭할 정도로 아름다운 벚꽃길을 자랑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십리벚꽃길을 끝까지 걸으면 평생 행복하게 함께할 수 있다는 설이 있는데

엄마 아빠는 지금까지 투닥투닥 하면서도 바퀴벌레처럼 딱 붙어 살아가는 걸 보면, 수도 없이 긴 세월 동안 십리벚꽃길을 너무 많이 걸어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단다.


스쳐지나가듯 피어나는 산수유도 너무 멋있고, 머지 않은 곳에 매화도 가득 피어나게 되는 봄의 지리산은 온 몸을 화려하게 빛내며 비로소 봄이 왔음을 이렇게 알려준다.


- 하동스타웨이


지리산의 여름

여름의 계절에 지리산의 푸르름과 그 생기는 따라올 풍경이 있을까. 

쏴아하고 시원하게 한바탕 내린 비에 더욱 힘차게 흘러내려오는 뱀사골 계곡물의 힘찬 흐름을 바라보면 머릿속과 마음속에 있던 무수한 고민과 잡념들이 다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뱀사골, 피아골 이런 너무나도 멋진 계곡을 낀 골짜기들이 많은 지리산은 어느곳이든 산길을 걷다가 마음에 쏙 드는 너른 바위가 나타나면 계곡물로 내려가, 무심히 양말을 벗어 툭툭털어 바위에 널어놓고, 바지 동동 걷어서 발을 시원한 물에 담가봐야 진정한 계곡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수건을 안들고 왔는데, 양말은 한켤레 뿐인데 하고 주저주저하며 계곡물에 발 담그는 걸 다음번으로 미룬다면, 당신은 아차하는 순간 가장 시원하고 깨끗한 그 해의 지리산 계곡물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고민없이 풍덩! 해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정말 계곡을 좋아하는 우리 아빠는 특히, 안전한 계곡물을 만나면 발 뿐만이 아니라 온몸을 던지는데, 사실 그래서 엄마아빠의 지리산 나들에는 수건이 함께한다.


시원하게 계곡물과 한바탕하면 더위에 흐르던 땀도 모두 씻겨내려가고, 피톤치드 온몸으로 느끼며 산속을 맨발로 걸어봐도 좋다.


의외로 나만 맨발로 걷고 있는게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마주오는 등산객과 미소를 한번 나누면서 괜한 동료의식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 하동스타웨이


지리산의 여름비

우리가족은 유난히 여름비 얽힌 지리산의 추억이 많다.


사실 지리산 계곡은 멋진만큼 위험하기도 한데, 지리산 계곡에서 놀다가 비가 한방울 톡톡 떨어지기 시작하면 얼른 뛰어나와야 하는데 생각보다 계곡물은 여름의 많은 비에 취약해서 금새 불어나버리기 때문이다.


조금전까지 하하호호하며 시간을 보내던 아늑한 계곡이라는 공간은 금새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괴물이 되기도 한다.


자연은 그만큼 더 거대한 움직임을 가진다.


우리 가족은 유난히 여름에 지리산으로 종종 드라이브를 갈 때마다 큰 비를 자주 만났다.


어느날은 태풍이 올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하룻밤만 머물다 가자 하며 펜션을 잡고 점점 거세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계곡 물소리인지, 빗소리진지 알 수 없게 뒤엉킨 엄청난 소리들을 들으면서 황토방에서 뜨뜻하게 자고 있던 우리 자매는 엄마 아빠가 다급하게 깨우는 소리에 새벽 4시부터 눈을 떠서 펜션 주인에게는 급히 문자만 남기고 지리산을 떠났다.


더 많은 비가 오면 아예 도로가 잠겨버릴까봐 그렇게 비와 태풍의 가는 길과 나란히 집으로 길을 나섰는데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차의 와이퍼 속도가 비가 떨어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차창에 비를 지우지 못하던 그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네명은 그 기이한 광경을 오롯이 바라보며, 조금은 떨면서 조금은 그 위태로움을 다같이 눈앞에서 보며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음을 즐기면서 지리산을 빠져나왔던 것 같다.


무탈하여 추억이지만, 탈이 났다면 분명히 위험했을 상황인데,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 또한 추억이 되었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지리산에서 비를 뚫고 달려왔던 그 날의 모든 세포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 지리산 들꽃산방 펜션


지리산의 가을

가을의 계절에 지리산은 더 없이 화려한 울긋불긋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작년의 지리산 가을 여행도 조금만 늦췄다면 멋진 단풍이 든 지리산을 볼 수 있었을텐데, 여름의 끝물에 방문했다보니 단풍을 보기에는 일러서 아쉬움이 조금 남았었다. 


아주 높은 산 꼭대기에서부터 서서히 물들어 내려오기 시작하는 단풍들은 화려함의 끝을 보여주다 하엽으로 발 아래 쉬게 되는데, 발 아래에서 바스락 거리는 그 낙엽의 느낌이 또 온전한 가을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서 가을의 지리산 산책은 느긋함과 여유를 준다. 모든게 져버리는 것 같아 쓸쓸하게만 느껴지는 가을이지만 지기전 최고로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나무들을 바라보면, 저마다 불타오르는 순간이 있지 하고 우리의 인생도 돌아볼 수 있게끔 해주는 것 같다.


초 가을의 지리산은 이제 4시만 조금 넘어도 해가 넘어가고 없고, 가로등불도 없는 곳에 가면 칠흙같은 어둠이 우리를 삼킬 것만 같기도 하다. 두려움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짧은 두려움 끝 눈부신 별빛들이 우리를 반기고 있어서 별이 쏟아진다는 건 이런거구나를 새삼스럽게 알 수있게 된다. 혼자는 위험하니, 여럿이 가볼 수 있다면 우리가족이 그러했던 것 처럼, 지리산 칠불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돗자리 하나 무심히 펴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하늘을 멍하니 바라봐도 좋을 것 같다.


오랫동안 도시에 살면서 별보다 밝은 네온사인들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에, 영원히 변치 않고 그 자리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는 작은 별빛들의 무리를 담으면 진정한 자연속에서의 쉼은 이런거구나 하고 느낄 수 있다.



- 지리산 들꽃산방 펜션



작년엔, 엄마의 생일을 맞아 엄마가 오랫동안 가보고 싶어했던 지리산 들꽃산방펜션을 예약했다.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이 뭉쳐서 떠난 여행이라 설레는 마음이 너무 컸다.


지금의 계절에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꽃들은 코스모스, 아스타국화, 백일홍 이런 꽃들이 정말 많은데


아쉽게도 바뀐 펜션의 주인 분은 들꽃을 좋아하는 분은 아니셨는지 아기자기한 꽃이 많이 보고싶었던 엄마에게는 조금 아쉬웠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멋진 지리산의 풍경을 그대로 안고 있는 펜션이라 꽃은 차치하고서라도 거센 계곡물 소리와 푸르른 지리산자락의 모습들만 보아도 힐링이 되는 공간임은 분명했다.



- 지리산 들꽅산방 펜션 들국화방



우리는 들국화 방을 예약하고 일찍 짐을 풀었는데


온전한 쉼을 위해 떠난 여행에서 고된 여정으로 힘을 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원한 지리산 물에 슥슥 과일들을 씻어서 얼른 계곡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앉아 과일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데 모두가 편안함을 느꼈다.


계곡 소리가 모든 다른 소리들을 집어삼킬 정도로 커서 정자에 벌러덩 누워서 눈을 감아도 좋고, 눈을 뜨고 한곳만 응시하며 멍을 때려도 좋다.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온전히 지리산에서의 시간을 느껴봤던 여름 낮.




- 오랜만에 마이크를 잡은 우리 엄마 아빠



많이 추울 것 같았던 지리산의 저녁은 견딜만 했고


계곡 소리에 묻혀 조금더 크게 도란도란 해볼 수 있었던 게 우리에게 또 재미를 줬다.


세상이 고요할 것만 같은 자연속에, 멈추지 않는 계곡물은 일정한 소리를 내주고 있어서 우리가 마음놓고 오랫동안 풀지 못한 회포를 마음껏 풀라고, 방어를 해주는 것만 같았다.


간만에 노래도 몇소절 불러보는 엄마 아빠의 장난스런 모습에 우리 모두다 까르르 넘어갔다.


몇모금 마셨던 맥주 탓인지, 맥주보다 중독되는 지리산 매력적인 공기의 무한 흡입 때문인지 모두 그 분위기에 취했던 밤밤밤.



하늘이 쨍하게 맑은 날이 유독 많은 가을에는


성삼재에 올라 발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아침저녁 기온차에 드리우는 운무를 헤엄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풍경을 보는 것도 멋이 있다.


겨울이 성큼 온 것 같은 추위를 온몸으로 맞으며 차에 굴러다니던 담요 하나 칭칭 감고 누군가는 따뜻한 믹스커피를 종이컵에 한잔, 누군가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컵라면 하나를 딱 까서 먹으며 성삼재를 느껴볼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취향일지?


엄마 아빠의 취향을 물려받은 나는 이 나이에 이런 감성이 있다고 하면, 벌써 아재 감성일지. ㅎㅎㅎ



- 어스름이 내린 지리산 늦 여름, 초가을의 저녁



지리산의 겨울

순식간에 다가올 겨울이라는 계절은 모두에게 혹독하다.


춥고, 거센 바람이 불고, 앙상해지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면 아무리 따뜻한 봄날을 준비하기 위한 휴식의 시기라고 하여도 쓸쓸함이 감돈다. 


하지만 하얗게 내린 눈이 어떤 날에는 치워야 하는 짐작 같다가도, 또 어떤 날에는 아침에 눈떠 온 세상이 하얗게 된 지리산을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을 선물 받는 것도 인생에서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무릎까지 푹푹 밟히는 눈을 헤치고 걸어서 꽁꽁 얼어붙은 계곡 물 위에서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타듯 미끄러져 보고, 떨어지다 그대로 얼어붙은 폭포의 모습에도 눈을 떼보지 못하기도 하면서 저마다의 지리산의 겨울을 느껴볼 수 있다.


오래전 동생과 꽁꽁 언 계곡 물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본 추억은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또 어느날은 지리산 쌍계사 북동쪽에 있는 불일폭포 올라가던 길에 추억이 한장 쓰였다.


너무 춥고 눈도 많이 쌓여서 돌아갈까 고민하던 중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 쯤에 엄마는 어느 작은 오두막을 발견하고 아주 잠시만 쉬어갈 수 있을지를 여쭤봤던 것 같다. 온 세상이 하얀 와중에 유일하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던 작은 오두막에서 추워보였던 우리 가족들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컵라면의 온기로 몸도 마음도 녹여주셨던 어르신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덕분에 힘을 내어서 불일폭포까지 잘 다녀왔던 것 같다.



엄마 아빠의 지리산 사랑이 없었다면 살아가면서 이런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까? 마음 따뜻해지는 지리산에서의 따뜻한 기억.



- 믿기지 않지만 6시 정도밖에 되지 않은 지리산 저녁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지리산에서의 짧고 아쉬운 하루가 저물었다.


우리만 공유하던 추억들을 나의 남편과, 동생의 예비 남편과도 나눌 수 있다는 게 벅찼던 것 같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가족들이 하나둘 늘어간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또 언젠가 태어나게 될 나의 아이들에게도

내가 부모님께 선물받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추억들을 나눠줄 수 있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볼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되짚어 볼 수록 더더욱 우리가족에게 의미있는 공간이었던 지리산은 정말 휘게의 공간이 아니었나 싶다.


지리산 여행의 소소한 이야기들은 또 다른 공간에서 더 풀어보는 걸로 하고 오늘의 기나긴 휘게 이야기는 여기서 끝.



다들 아쉽지만, 내일을 위해 일찍 편안히 잠드는 하루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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