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의 산 17
자연성릉 너머 주 능선이 이어지는 천황봉까지
계룡산은 야무지고도 아름다운 명산임을 재차 각인시킨다.
걸음 멈춰 곳곳을 바라보노라면 눈을 뗄 수 없어
마냥 멈춰 서있게 된다.
충남 공주시, 계룡시, 논산시와 대전광역시에 접하는 계룡산鷄龍山은 지도상으로 대전, 공주, 논산을 연결하여 세모꼴을 그리면 그 중심부에 위치한다.
1968년 지리산에 이어 두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공주와 부여를 잇는 문화 관광지에 유성온천과도 연결되는 대전광역시 외곽의 자연공원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서울, 부산 등 전국 대도시 어느 곳에서든 1일 탐방이 수월하고 다양한 탐방로와 수려한 산세로 연중 탐방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주봉인 천황봉에서 연천봉과 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 볏을 쓴 용의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계룡산 최고봉인 천황봉(해발 845.1m)은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입산이 금지되어있으며 한국통신 중계탑이 세워져 있다. 대전을 비롯해 공주, 논산 일원의 산야가 한눈에 잡히는 천황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 얼마나 경이로울까만 계룡 8경의 제1 경이라는 천황봉 일출은 결국 화중지병인 셈이다.
한때 전국 각지에는 계룡산에서 도를 닦은 도사임을 자처하는 무속인들이 비일비재하였다. 사주, 팔자에 관상을 봐주며 사람들의 미래를 쥐락펴락한 이들도 꽤 많았다. 19세기 말엽부터 전래 무속신앙과 각종 신흥종교가 번성하여 계곡 곳곳에 교당과 암자, 수도원들이 들어섰는데 1980년대 이후 종교 정화 운동으로 시설물들이 철거되고 주변을 정리한 상태이다.
계룡 8경을 속속 이어가며
여러 차례 계룡산을 탐방했는데 그때마다 가려던 곳을 다 가지 못하고 발 돌리는 느낌이 들었다. 계룡산은 그런 산이다. 주봉인 천황봉을 위시한 20여 개의 연봉이 일렬이나 종횡이 아닌 마구잡이로 솟아있어 들르지 못한 봉우리의 여운이 진하게 남는다.
이번에는 계룡산을 대표하는 사찰인 갑사, 신원사, 동학사와 장군봉, 신선봉, 연천봉, 관음봉, 삼불봉의 다섯 봉우리를 연계하는 일명 계룡산 3사 5봉 코스에의 유혹에 넘어갔다. 계룡산의 개방된 정규 등산로를 한 번에 모두 탐방할 수 있는 코스인지라 산행 후 아쉬운 앙금은 남지 않을 거였다. 거기 더해 절정으로 단풍 물든 완연한 가을이다.
좋은 산의 좋은 코스는 초콜릿처럼 늘 달콤한 유혹이다. 거리도 적당하고 산행 당일에도 특별한 선약이 있지 않아 참석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침 9시쯤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의 박정자 삼거리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박정자가 누구지? 연극배우 박정자? 할매보쌈의 원조라는 그분?”
학봉리는 뒷산에 밀양 박씨 박수문의 선대 3 묘가 자리 잡고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풍수지리에 능통한 이가 묘의 위치를 보고는 범과 용의 형체를 갖춘 명당이나 앞쪽이 허하여 장차 커다란 수해를 입을 것이라 하여 밀양 박씨 후손들이 이곳에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후 350여 년의 세월이 지나 거목으로 자라 길손의 쉼터가 되어 사람들은 박 씨들이 삼거리에 정자나무를 심었다면서 이 자리를 박정자라 부르게 된 것이다.
실제 1980년도 학봉리 지역에 역대 최대의 장맛비가 내렸는데 박정자는 인근 지역의 피해를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때의 장맛비로 10여 그루가 유실되고 현재 두 그루만 남아있다.
현재 박정자 삼거리는 공주시와 대전광역시 그리고 계룡시와 논산시를 이어주는 교통 요지이자 계룡산 국립공원과 학봉리 동학사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들머리인 병사골 탐방로로 향한다. 임도를 따라 걷다가 장군봉 쪽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올라오다 돌아서서 내려다보면 산들이 둘러싼 박정자 삼거리는 분지처럼 아늑한데 장군봉 오르는 숱한 계단은 처음부터 숨을 몰아쉬게 한다.
탐방안내소에서 1km의 거리인 장군봉까지 힘겹게 올라 마을 우측으로 치개봉과 황적봉, 그 우측 너머로 천황봉, 쌀개봉, 관음봉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다가 다시 행보를 잇는다. 아무래도 오늘 산행은 쉼표를 줄여야 할 것이다. 호락호락 만만한 코스가 아닌지라 자칫 시간을 넘겨 완주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계단을 내려서고 암릉을 올랐다가 또다시 오르락내리락 굴곡진 경사 구간이 반복된다. 왼쪽으로 치개봉을 가깝게 보면서 봉우리 하나를 넘게 되는데 지나고 보니 임금봉이다. 암릉 밧줄 구간도 더러 있지만, 조망이 트여 걸음걸이의 무거움을 덜어준다.
갓바위 삼거리를 지나고 큰베재를 바로 통과하며 남매탑 고개에서도 쉼 없이 추켜올린다. 5층과 7층 두 개의 석탑이 나란히 선 남매탑(해발 615m)에 이르러 예전에 왔을 때 탑돌이를 하며 정성스레 소원을 빌던 아낙네들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제1호인 남매탑은 두 탑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5층 석탑은 보물 제1284호, 7층 석탑은 보물 제1285호이다. 오뉘탑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두 기의 탑에도 그럴듯한 유래가 전해 내려온다.
신라 성덕왕 때 상원 조사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불공을 드리던 중 호랑이가 찾아와 입을 벌리고 우는 소리를 내었다. 스님은 호랑이의 목에 걸린 큰 뼈다귀를 빼주었고 호랑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그런데 호랑이가 얼마 후 다시 나타나 스님을 태우고 어디론가 달려갔는데 거기에 실신한 처녀가 있었다. 스님이 그 처녀를 암자로 데리고 와서 정성껏 간호하자 처녀의 정신이 돌아왔다.
“저는 상주에 사는 임 진사의 딸인데 혼인날 호랑이가 나타나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곳에 와있는 거죠?”
스님이 호랑이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이건 필시 부처님이 맺어준 부부의 연일 것입니다.”
처녀는 이렇게 말하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상원 조사는 흔들리지 않고 수도에 정진하였다. 그 후 스님과 처녀는 의남매를 맺고 불도를 닦으며 일생을 보냈는데 후에 상원 조사의 제자 회의 화상이 두 개의 불탑을 세워 그 뜻을 기리며 오뉘탑이라 불렀다고 한다.
부부가 될 뻔했다가 남매가 되는 난해한 상황을 멋대로 추론해보며 남매탑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십오야 밝은 보름달이 남매탑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불현듯 계룡 8경 ‘오뉘탑의 명월’을 눈에 그리다가 다음 행선지로 걸음을 옮긴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르는 산길
가을이 익은
산의 품속은 아늑하다.
천인단애 단풍 곱게 물든
계룡의 계곡에서 울리는 메아리
하늘은 호수가 된다.
멀리 시공으로 손바닥만 하게
한밭 시가가 열리고
호연지기 마시는 바람
혈맥을 흐른다.
골짜기마다 타오르는 불꽃
흐드러진 가지가지
무상의 잎을 달고
남매탑을 지난다.
- 계룡산에 올라 / 신익현 -
너른 공터에 헬기장이 있는 금잔디고개를 지나 신흥암에 눈길만 던지고는 용문폭포로 와서 바위에 걸터앉았다. 물은 많지 않지만, 계곡의 시원한 바람이 다소나마 강행군의 피로를 덜어준다. 잠시 쉬었다가 눅진한 몸을 일으켜 대성암을 통과하고 갑사까지 내려온다.
갑사에서 연천봉을 딛고 신원사로, 그리고 또 관음봉으로
노송과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갑사는 언제나처럼 아늑하고 수수하다. 갑사의 가을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즈넉하여 그 계절에 여기 오면 가을 남자가 되고 만다.
춘 동학 추 갑사라는 말처럼 갑사계곡의 가을 단풍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갑사에서 금잔디고개로 오르다 보면 몸과 마음이 붉게 물들어질 정도로 추색이 고운 곳이다. 갑사계곡의 단풍은 그래서 계룡 8경에 꼽혀있다. 계룡갑사라는 현판이 걸린 갑사 강당이 그렇듯 법당 대다수가 화려함을 추구하는 건축 기교를 없앴기에 더욱 웅장하고 숙연해 보인다.
통일신라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였던 갑사는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 가장 으뜸간다 하여 갑사로 명명했으니 이름대로라면 첫째가는 절인 것이다.
조선 세종 때의 사원 통폐합에서도 제외될 만큼 명망이 높았던 절이었으며, 1459년 조선 7대 왕 세조는 부친인 세종의 ‘월인천강지곡’과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을 합편한 불교 서적 월인석보月印釋譜(보물 제745호, 보물 제935호)를 이곳 갑사에서 판각하게 하였다. 그 목판 중 일부가 갑사에 소장되어있다.
그런 갑사를 둘러보았으니 세 개의 사찰 중 첫 사찰을 접수한 셈이다. 갑사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2.2km 거리의 연천봉으로 올라간다. 물기 없는 갑사계곡을 통과하고 원효대를 지난다. 바윗길과 경사 심한 계단을 반복해 올라 연천봉 고개에 다다르니 여기서도 거친 숨을 몰아쉬게 된다. 헬기장을 지나 천황봉이 좀 더 가까워진 연천봉에 이르렀을 때는 머리에서 뜨끈한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갑사계곡과 신원사 계곡 사이의 계룡산 줄기에 솟은 연천봉(해발 738.7m)은 계룡 8 경인 연천봉의 낙조로 유명한데, 저녁나절 산야를 붉게 물들이고 멀리 은빛으로 반짝이는 백마강 물줄기의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는 계룡산 연봉의 하나이다.
이성계는 여기에 제단을 차려놓고 이곳에 왕도를 세울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이곳에 신도를 정하기로 하고 공역을 시작했는데 꿈에 나타난 신선이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라고 일러주는 바람에 한 해 동안 이어진 공사를 멈추면서 이 지역을 신도내新都內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바람에 서울은 인구 1000만 명이 넘는 인구 초밀도 지역이 되고 말았다. 설화는 그러하지만, 역사학자들은 계룡산이 동쪽, 서쪽과 북쪽의 3면과 너무 떨어진 남쪽에 치우쳐 도읍으로서의 부적합한 위치 탓으로 옮겼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구한말부터 유포된 정감록鄭鑑錄이 계룡산 밑에 새 왕조가 도읍할 거라고 예언하면서 계룡산 일대에 수많은 종교인이 모여들었다. 불교, 유교, 기독교, 단군, 도교, 무속 등의 집단 종교단체가 우후죽순 퍼졌으며 이후에도 계룡산은 신도내를 중심으로 신흥종교들이 진을 치기에 이르렀고 가히 무속인들의 천국으로 터를 다져나가기도 했다.
그런 내력을 떠올리며 사위를 둘러보니 절로 도가 닦여지는 느낌도 들고, 생생한 에너지가 충만한 기분으로 연천봉에서 동운암과 보광원을 지나니 힘도 덜 부치는 듯하다.
그렇게 두 번째 사찰인 신원사로 내려왔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인 신원사는 동학사, 갑사와 함께 계룡산 3대 사찰이자 동서남북 4대 사찰 중 남사南寺에 속한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80호로 지정된 대웅전에서 50m 떨어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7호인 계룡산 중악단中嶽壇이 있다. 본래 계룡산의 산신 제단으로 계룡단으로 불렀었는데 묘향산에 상악단, 지리산에 하악단을 두고 있었으므로 조선 말엽부터 중악단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우리나라 산악 신앙 제단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중악단의 경계구역은 612㎡로 둘레에 축담을 둘렀고 전면에 이중의 내외문內外門이 있다.
신원사에서 나와 고행 구간으로 알려진 연천봉 고개로 향한다.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가는 고행의 노선이다. 체력의 급격한 소모를 느끼기에 보폭과 속도를 조절하며 걷게 된다. 극락교를 지나 고왕암에 이르러 갈증을 씻는다.
신라 김유신과 당나라 소정방이 합세한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을 때 백제의 태자 융隆이 7년간이나 이곳의 융피굴에 피신해 있다가 잡히면서 이름 붙여진 암자이다. 고왕암에는 백제 시조인 온조왕부터 마지막 의자왕까지 31대 백제왕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연천봉 고개까지 참으로 버겁고 고된 1.1km 구간을 융 태자의 힘든 은신 생활을 떠올리며 올라선다. 설악산 서북 능선의 귀때기청봉을 연상하게 할 정도의 거친 바윗길을 지나는데 오를수록 힘이 부친다. 더 많은 힘을 쏟아 연천봉 고개에 다다르자 연천봉에서 관음봉 쪽으로 많은 산객들이 몰려든다.
관음봉을 100m 남겨두고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이다. 나무 평 마루에 잠깐 앉았다 일어서는 거로 숨을 돌리고 계룡산 최고의 조망 장소인 관음봉(해발 766m)에 닿았다.
아래로 동학사 계곡, 고개 들어 천왕봉 능선을 보면서 육체적으로 겨운 감각까지 일시에 일으켜 세워졌다면 과장일까. 많은 풍광 가운데 자연성릉은 보는 이를 끌어당길 정도로 멋진 암릉길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공주 10경에도 포함된 관음봉에서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보면 신선이 된 기분이 든다고 하여 관음봉 한운 역시 계룡 8경으로 꼽는다. 머리 위의 조각구름을 올려다보고 다시 자연성릉의 웅장한 자태를 마주하며 긴 계단을 내려선다.
자연성릉은 말 그대로 자연이 만들어낸 성스러운 걸작이다. 바위 능선과 여기서 보이는 속리산 곳곳의 정경이 계룡산을 장대하고 강하게 각인시킨다. 수직에 가까울 만큼 속도감 있게 내리 뻗은 산자락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기를 심어준다.
당대의 베스트셀러 ‘시크릿’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주의 기를 쓸어 담아 원하는 바를 성취할 장소로 적합하단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삼불봉으로 향하면서 그 자체로도 나무랄 데 없이 고고하고 멋진 자연성릉이 자꾸만 고개를 돌리게 한다. 0.8km 길이의 자연성릉을 지나자 삼불봉까지도 0.8km가 남았다. 또 숱한 철제 계단을 오른다.
고난도의 세 구간을 버겁게 통과하고
여보게 계룡산이 어떠하던가
산에는 단풍이요 들에는 곡식
그림을 보기만도 눈이 바쁜데
벼 향기 무르녹아 코를 찌르네
- 계룡산 / 노산 이은상 -
동학사와 갑사가 내려다보이는 삼불봉(해발 775m)은 계룡산 연봉 중의 하나로 세 개의 봉우리가 세 부처의 형상을 닮아 그렇게 부른다. 눈꽃 만발한 삼불봉의 겨울 설화 또한 계룡 8경 중 하나이다.
자연성릉 너머 주 능선이 이어지는 천황봉까지 계룡산은 야무지고도 아름다운 명산임을 재차 각인시킨다. 걸음 멈춰 곳곳을 바라보노라면 눈을 뗄 수 없어 마냥 멈춰 서있게 된다. 삼불봉에서 철제 계단과 돌계단을 딛고 다시 남매탑으로 내려간다.
신선들이 폭포의 아름다움에 반해 오래도록 머물렀다는 동학사 계곡 상류의 은선폭포는 절벽과 수림이 어우러진 절경으로 특히 안개가 자욱할 때의 풍광이 압권이라 계룡 8경으로 추리고 있다. 거리를 두고 수풀 사이로 바라보는 폭포의 긴 물줄기가 아련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폭포 위에서 아래까지 가느다란 실이 한 올 한 올씩 풀어지는 듯하다.
동학사 계곡에 이르러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뿜어낸다. 피톤치드의 청량감에 상쾌하고 힘든 여정을 무사히 마친 통쾌한 기분에 굳었던 근육이 느슨하게 이완된다.
동학사 계곡은 자연성릉과 쌀개봉 능선, 장군봉 능선, 황적봉 능선 등 계룡산을 대표하는 능선들 사이에 깊게 패어있는 계곡으로 수림이 매우 울창하다. 지금 한껏 물든 단풍도 곱지만, 특히 신록의 동학사 계곡을 걷노라면 나이와 관계없이 젊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여기 동학사 계곡 신록도 계룡 8경으로 꼽고 있다.
돌길을 밟고 작은 현수목교를 지나 포장도로에 이른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자 비구니들의 불교 전문 강원講院인 동학사東鶴寺는 이 절 동쪽에 학의 모양을 한 바위가 있어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고려 때 여기 동학사에서 고려 3 은으로 칭하는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야은 길재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단을 쌓아 삼은단三隱壇이라 하고 전각을 지어 삼은각三隱閣이라 하였다.
조선 세조 때는 삼은단 옆에 단을 쌓아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의 제단을 증설하였다. 다음 해에는 세조가 동학사에 와서 제단을 살핀 뒤 단종을 비롯하여 정순왕후, 안평대군, 김종서, 황보인 등과 사육신, 그리고 조카 단종을 폐위시킨 자신의 왕권 찬탈로 인해 원통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을 짓게 하였다.
“사후약방문이야, 뭐야?”
그들의 영혼이 돌아온들 원통함이 사그라질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벌겋게 달아있는 솥에 몇 방울의 물을 떨어뜨린다고 솥이 식을 리 있겠는가. 당대의 막강 지존 세조도 자신의 사후 그들과의 조우가 두려웠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박정자에서 동학사에 이르는 계룡산 3사 5봉의 종주를 마무리했음에도 오늘 걸었던 고행 구간을 복기하니 다시 무릎이 저린다. 들머리 병사골 탐방센터에서 장군봉을 오르는 초반 1km 구간, 갑사에서 연천봉까지의 2.2km, 신원사에서 연천봉 고개까지의 1.1km에 이르는 고난도의 구간을 떠올리며 바라보는 계룡산은 그래도 다감하여 언제든 다시 오겠노라는 생각을 떨구지 않게 한다.
때 / 가을
곳 / 박정자 삼거리 – 병사골 탐방안내소 - 장군봉 - 임금봉 - 남매탑 - 신선봉 - 금잔디고개 - 갑사 - 연천봉 - 신원사 - 연천봉 고개 - 문필봉 - 관음봉 - 자연성릉 - 삼불봉 - 남매탑 - 동학사 - 동학사 계곡 - 무풍교 – 동학사 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