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산 20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부턴가 숱하게 이어져 오던
질곡의 세월을 그저 헤쳐 나가는 생활 습관처럼
높건 낮건 길을 따라갈 뿐이다. 그렇게 나서면
산이 있고 산에 안기곤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는 중인가.”
산행을 하다 보면 멈춰 서서 지나온 행보와 가야 할 길을 가늠하고 현재의 위치를 점검하게 될 때가 있다. 인생역정 또한 자신의 현실과 미래를 재고하고 수정하며 나아감이 산에서의 행보와 닮은꼴이다.
영산강이 시작되는 청정지역이며 남도의 맛과 멋이 시작되는 문화의 고장으로 늘 푸른 대나무의 고장 담양에 또 오게 되었다. 추월산에 온 이후 또다시 병풍산을 찾으면서 전남 담양과 연을 쌓아간다.
“한가로운 주말, 나는 그냥 무심코 있고, 특별히 할 일도 없어 무작정 따라나선다.”
오늘은 B 산악회에서 병풍산과 불태산의 연계 산행코스를 잡아 따라나서게 되었다. 역마살이 낀 건 아니지만 무어라도 하는 일 없이 집에서 빈둥빈둥하는 게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보다.
“병풍산?”
가보지 않은 산이라 얼른 구미가 당겼다.
2016년 7월 3.48km의 등산로 ‘수행자의 길’을 조성함으로써 담양의 대표적 웰빙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담양호 용마루길 산책로와 연계하여 트레킹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등산로 능선이 13개 봉우리로 형성돼 능선마다 설치된 스토리텔링의 테마를 즐길 수 있으며, 주변의 뛰어난 자연경관 담양호, 금성산성, 가마골, 추월산 등을 감상할 수 있다.
담양군에서 가장 높은 병풍산은 산세가 병풍을 둘러놓은 모습과 비슷하여 명명되었다. 한국 지명사전에 열거된 스무 개 남짓한 병풍산이란 이름의 산들이 그렇듯 담양의 병풍산도 여러 폭의 병풍을 세운 것처럼 바위 절벽이 둘러섰다.
병풍屛風은 북쪽에서 부는 하늬바람을 차단하여 배산背山이 된다는 의미로 이 바위 병풍이 겨울 북풍을 막아주어 남쪽의 화순과 광주지방이 겨울을 비교적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고 한다.
병풍산 남서쪽으로 험준하게 솟은 바위산인 장성 쪽의 불태산은 전차부대의 사격장이 있어서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였다가 근래 개방되어 발길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다.
“도상거리도 15km가 넘지만, 능선의 오르내림이 심해 시간이 꽤 소요되는 코스입니다.”
시간 맞춰 하산하여 귀경에 차질이 없도록 해달라는 산악대장의 멘트를 듣고 버스에서 내린다.
가파른 오르내림의 거듭되는 반복
송정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들머리 안내판에 천자봉까지 2.1km라고 적혀있다. 대방 저수지 뒤의 야영장을 지나면서 초반부터 가파른 등산로가 이어진다. 늦여름 고온다습한 날씨인지라 땀깨나 흘릴 것 같다.
들머리를 10여 분도 지나지 않아 산허리를 휘감는 임도를 질러 걷다가 가파른 통나무 계단을 오른다. 암릉 구간이 나타나고 밧줄도 늘어져 있지만, 줄을 붙들고 오를 정도는 아니다. 덥긴 해도 무등산이 보이고 멀리 지리산도 바라볼 수 있는 시계라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강천산과 추월산까지 그다지 멀지 않아 고도를 높이면서도 힘 쏟는 일에만 치중하게 하지는 않는다.
능선에 닿아 건너편의 천자봉과 그 왼쪽으로 병풍산 정상을 보며 초반 가쁜 숨을 고른다. 담양의 들녘이 발아래 펼쳐졌고 병풍산 오른쪽으로 불태산도 모습을 드러냈다. 반대편의 옛 용구산 산정을 가늠하고 물푸레나무 무성한 길을 지나 돌무더기 쌓아놓은 천자봉天子峰(해발 725m)에 닿는다.
옥녀봉이라고도 부르는 천자봉에서 아주 잠깐 완만하다가 바로 바위 군락 지대를 걸어 815m 봉으로 다가간다. 가드 라인이 설치된 된비알을 길게 오르자 삼인산三人山이 멀지 않은 데 명칭처럼 사람 인자 셋을 세워놓은 우뚝한 형상이다.
제법 긴 계단을 올라 815m 봉에 닿으면 병풍산이 지척에 있다. 그 뒤로 불태산은 여전히 아득하다. 불어오는 산바람에 송송 맺힌 땀을 말리면서 눈에 보이는 거리감에 흔들리지 않고자 한다. 들머리인 대방 저수지 뒤로 담양의 아담한 마을들과 농경지에서 눈을 거두고 걸음을 빨리해 병풍산 정상(해발 822m)에 닿았다.
전라남도 담양군의 수북면과 장성군 경계에 있는 병풍산은 호남정맥 추월산 서편에서 남서쪽으로 향한 병풍산 능선이 도마산과 용구산에 이어지고 남동쪽으로 삼인산과 연결된다. 노령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답게 산세가 우람하고 경관이 뛰어나다. 북쪽은 황룡강의 발원지로 용흥사가 위치하며, 남사면 한수동골 국제 청소년수련원에서 흐른 수북천은 영산강으로 합류한다.
1756년 담양 부사 이석희가 펴낸 ‘추성지秋成誌’의 기록을 보면 풍수지리상 병풍산에서 좌우로 뻗어 내린 능선들이 마치 지네 발을 닮아서 담양 객사에 지네와 상극인 닭과 개를 돌로 만들어 세우고 재난을 막았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없애 버렸다고 적혀있다.
“쌈질하러 온 놈들이 남의 보험은 왜 해약하는 거야.”
정면으로 투구봉의 바위가 뻗어있으며 왼쪽에 불태산과 오른쪽으로 천봉이 길을 열어두고 있다. 시원하게 펼쳐진 나주평야까지 한눈에 담고는 걸음을 빨리해 만남재 갈림길에서 삼인산 방향을 접고 투구봉에 이른다. 작은 돌을 앙증맞게 세운 투구봉 정상석이 있는데 해발고도 표시도 없다. 곧바로 이동한다. 대치로 내려가는 능선에는 달걀버섯들이 무리 지어 있고 싸리나무 꽃들도 무수하게 피어있다. 가는 여름과 오는 가을이 부딪치면서 억새도 생기를 찾는 모양새다.
잠시 신선대에 걸터앉아 갈증을 해소하며 주변의 산야를 둘러보다가 차량 통행로인 한재(대치)로 내려선다. 장성군 북하면과 담양군 대전면을 잇는 898번 지방도로이다. 매점도 있어 몇몇 산객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행로를 준비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300m가 넘는 고도를 높여가야 한다. 왕복 800m 거리의 병장산(해발 685m)을 오를 수 있는 길이기도 한데 처음 예정대로 매점 뒤로 천봉 오르는 길로 들어선다. 가파른 오르막을 치고 올라 보두산 갈림길을 지나 불태봉 방향으로 내려선다. 산악대장이 했던 말 그대로 오르내림의 반복이다.
유탕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인 재막재에서도 오르막은 꾸준히 고도를 높인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부턴가 숱하게 이어져 오던 질곡의 세월을 그저 헤쳐 나가는 생활 습관처럼 높건 낮건 길을 따라갈 뿐이다. 그렇게 나서면 산이 있고 산에 안기곤 하는 것이다. 천봉에는 정상석도 없고 돌무더기만 덩그러니 쌓여있다. 산 아래 수북면 마을 일대와 대이 저수지를 내려다보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불태산으로 걸음을 옮긴다.
불태재에 이르러 돌아보니 병풍산이 아득히 멀어졌다. 서동마을 갈림길에서 불태산 정상을 올랐다가 다시 이리 내려와야 한다.
왼쪽으로 다시 삼인산을 두고 오른쪽 아래로 수확을 앞둔 수북면 들판을 바라보며 정상인 불태봉에 닿는다. 불태봉에서 갓봉과 깃대봉으로 더 진행하여 하산할 수도 있었겠지만,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므로 다시 서동마을 갈림길에서 서동마을(유탕리)로 하산한다.
불태봉 북쪽 나옹암 터 뒤의 석벽에 유탕리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고려 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나옹암 암벽 뒤편에 조각한 것이라는 설이 있고 나옹화상이 이곳을 떠나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화상을 그리고 “내 화상이 없어지면 내가 없으며, 다시 나타나면 내가 다시 태어난 줄 알아라.”라고 하였다고도 전한다.
서향의 이 마애불은 거대한 암벽에 음각한 입상인데 현재 급경사의 계곡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2단의 기단 석축이 남아있고 정리된 마애불 주변에는 기와 조각이 산재하여 나옹암지임을 추정케 한다.
더 내려가면 하청용추라고 부르는 작은 폭포에 이른다. 양쪽에 문처럼 큰 돌이 서 있는데 삼청동구 넉 자가 새겨져 있다. 폭포 아래 소에 살던 용이 그 사이로 빠져나갔단다. 용추라는 수많은 장소를 둘러보았지만, 용이란 용은 모두 하늘로 올랐거나 어디론가 빠져나갔다는 설만 남아있다. 이제 평탄한 숲길과 오솔길만 남았다.
“운동에 누워 쉬니 즐거움이 절로 나누나.”
운동雲洞이라고도 하는 서동마을에 닿는다. 장성 부사가 산수가 좋은 이곳에서 정각에 누워 쉬고 있는데 구름이 흘러가는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구름 운자를 넣어 시 한 수를 지었다고 한다.
“운동에 내려오니 온몸이 뻐근하구나.”
일행 중 한 명이 장성 부사를 패러디하자 다들 웃으며 서로를 격려한다. 고된 수고로움을 겪은 후에는 얽히었던 번뇌의 틀에서 멀찍이 벗어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산에서 흘리는 땀은 그래서 수도자의 기도에 비유되고 하산하면 깨달음을 얻은 듯한 착각에 빠져들곤 한다.
때 / 늦여름
곳 / 송정마을 - 천자봉 - 병풍산 - 투구봉 - 한재(대치) - 천봉 - 불태산 - 유탕리 마애불 - 하청용추 - 서동마을